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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박물관
70년대 고교야구 스타
아이스코쿤 | 2011.08.29 | 조회 33,698 | 추천 66 댓글 0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의 김성한(金城漢) 총감독이 모교인 군산상고의 감독을 맡게 됐다는 소식을 들으니, 70년대 뜨거웠던 고교야구의 열기가 다시 떠오릅니다. 김성한(金城漢) 감독은 1976년과 1977년, 투타에 모두 능한 한국 고교야구의 최고 인기스타중 한명이었지요.

70년대에는 고교야구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면, 서울시내 교통이 뜸해질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했습니다. 동대문야구장을 가득채운 재학생과 졸업생의 응원단이 펼치는 응원전도 볼만했지요. 그래서 당시 고교야구 선수들중에는 1년을 '꿉는'(1년을 같은 학년에 더 재학하는 것)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요즘 30대 중반 이하 사람들은 그 당시 고교야구의 열기를 잘 모르겠지만, 30대 중반 이상의 독자들은 그 시절의 향수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을 위해 저의 기억을 되살려 뜨거웠던 70년대 고교야구 스타들을 상(1970~1974년)과 하(1975~1979년)로 나누어 리뷰해 보겠습니다.


 


▶1970년

경북고(대통령배 우승), 대구상고(청룡기 우승), 성남고(황금사자기 우승)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습니다.

당시 대구상고의 정기혁(鄭基赫) 투수는 정확한 컨트롤의 기교파 투수로 청룡기 우승과 황금사자기 준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요즘 미국 프로야구에서 ‘컨트롤의 마법사’로 불리는 그렉 매덕스(Greg Maddux)와 투구 폼이나 구질이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는 한양대에 진학해서는 퍼팩트 게임을 기록하기도 했지요. 이후 기업은행에서 활동하며 국가대표에도 선발됐던 정기혁(鄭基赫)은 더이상 빛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3년전 인터뷰를 위해 정기혁(鄭基赫) 투수를 만난 적이 있는데, 서울 강남에서 대형 스포츠센터를 운영하고 있더군요. 그의 아들 역시 당시 두산 베어즈에서 투수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만큼의 주목은 받지 못했습니다.






#사진1#


<사진설명: 대구상고 3학년때 정기혁 투수의 연습투구 모습(왼쪽)과 그의 아들인 두산베어스 소속 정진용 투수의 투구모습. 외모와 투구폼이 닮았다.>


 


 


그해 투수 부문에서 성남고의 좌완 투수 노길상(盧佶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노길상(盧佶相)은 전국 규모 고교대회에서는 최초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지요. 상대는 다름아닌 경북고였습니다. 노길상(盧吉相)은 대회 3일째인 9월25일 경북고를 상대로 1대0으로 노히트노런을 이끌어냈습니다. 빠른 공에 낙차가 큰 커브로 막강 경북고 타선을 완벽히 틀어막았고, 만일 4회와 5회 한차례씩 볼넷을 내주지 않았다면 퍼팩트게임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성남고는 결승전을 앞두고 박점도(朴点道) 감독이 고혈압으로 쓰러지는 불상사가 벌어졌지만, 감독없이 최종 결승전에서 대구상고를 4대2로 물리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물론 황금사자기는 입원중이던 박 감독에게 바쳐졌지요.


#사진2#



<사진설명: 노길상 투수의 모습>

이밖에 1970년에는 배문고의 백창현(白昌鉉), 2학년 라이벌인 경북고의 남우식(南宇植)과 부산고의 김정수(金貞洙)가 투수 부문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타격에서는 대구상고의 포수인 김종우(金鍾佑)와 선린상고의 2학년 이해창(李海昌)이 슬러거로 꼽혔습니다.



▶1971년

경북고가 전무후무한 기록을 낳은 한해입니다. 대통령배·청룡기·황금사자기, 그리고 그해 신설된 봉황대기 등 서울에서 열린 4개 대회를 모두 우승했고 부산에서 열린 화랑대기 마저 휩쓸었습니다. 경북고는 운도 좋았습니다. 패자부활전이 있는 황금사자기 대회에서는 중앙고에 패배를 기록했다가 이후 기사회생, 결국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중앙고의 2학년 투수 윤몽룡(尹夢龍)에게 단단히 혼이 났지요.


당시 경북고의 타선은 지금도 기억에 선합니다. 1번 천보성(千普成) 2번 배대웅(裵大雄) 3번 김철(金徹) 4번 정현발(鄭鉉發) 5번 남우식(南宇植) 6번 박용훈(朴容勳) 7번 추경덕(秋京德) 8번 최광수(崔光秀) 9번 손상대(孫相大)로 이어지는 황금타선이었습니다. 이들중 천보성(千普成) 배대웅(裵大雄) 정현발(鄭鉉發) 선수는 프로야구 무대에까지 뛰었지요. 

당시 남우식(南宇植) 투수는 모든 게임을 거의 혼자 던지다시피 했습니다. 1학년때부터 대부분 게임을 혼자서 던졌으니, 요즘 같았으면 아마 감독이 ‘선수 혹사죄’로 감옥에 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특히 봉황기 대회에서는 54이닝을 완투, 단 2실점만 하는 ‘철완’을 과시했습니다. 결승전에서 남우식(南宇植)은 대광고의 ‘아리랑 볼’ 기교파 투수인 이동한(李東翰)과 손에 땀을 쥐는 투수전을 벌인 끝에 1대0 완봉승을 거두며 최우수선수상을 안았습니다.

당시에는 스피드건이 없었지만, 천보성(千普成) 현 한양대 감독은 “남우식(南宇植)의 공 스피드는 당시 150㎞는 충분히 나갔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투수란 마운드의 종합 예술가지요. 직구 하나만 달랑 던지기보다는 슬라이더, 커브, 싱커, 포크볼, 체인지업, 너클볼 등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면 금상첨화입니다. 여기에 컨트롤을 필수로 갖춰야 합니다. 타자의 심리를 읽고 게임을 요리하는 노련미도 필요하지요. 유명 투수가 되려면 그런 요소들이 다 필요하지만 기본은 역시 빠른 직구입니다. 강속구는 어깨·허리·손목의 힘이 든든한 하체를 바탕으로 조화를 이룰 때 나온다고 합니다. 아무리 덩치가 큰 투수라도 팔의 힘만으로 던지면 총알 같은 강속구는 나오지 못하지요. 175㎝ 정도의 신장에 보통 체격이던 남우식(南宇植)은 온몸으로 강속구를 던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교시절만 놓고 보면 선동열(宣銅烈)·최동원(崔東原)·김시진(金始眞) 등 그 어느 투수도 남우식(南宇植)의 인기와 영광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해 최초로 일본과의 고교 교환경기가 열렸는데, 남우식(南宇植)이 맹활약한 한국 선발팀은 콧대 높던 일본팀에 6전 전승을 거두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깜짝 놀란 일본야구협회장이 직접 찾아와 매년 정기전을 치르자고 사정했을 정도라고 하네요.


하지만 고교시절 지나치게 어깨를 혹사한 탓에 남우식(南宇植)은 한양대에 진학한 이후 팔꿈치와 어깨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결국 실업야구단 롯데 자이언츠를 끝으로 1980년 12월 야구계를 떠났습니다. 과열된 고교야구 때문에 아까운 선수의 수명이 단축되고 만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선수시절 못지않게 성실하게 뛰었답니다. 현재 남우식(南宇植)은 롯데햄우유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이따금씩 남우식(南宇植)씨가 회사에서 승진할 때마다 신문의 피플면에 그의 소식이 실리고 있습니다. 그는 기자에게 "야구만 하다가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처음엔 너무 어렵더군요. 낮에는 영업사원으로 그라운드가 아닌 마케팅에서 경쟁했고 밤에는 경영대학원을 다니며 자신과 싸웠습니다. 운동을 하다가 직장생활을 하는 후배들을 위해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자신이 임원이 된 소감을 말했습니다.


#사진3#


<사진설명: 남우식 투수의 경북고3학년때 모습(왼쪽)과 현재 모습>


 


 


당시 남우식(南宇植)과 청룡기 결승전에서 맞붙어 0대1로 패했던 경남고 김성관(金成琯) 투수는 이후 타자로 전향, 고려대를 졸업하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남 선수와 함께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또 프로구단 현대의 김재박(金在博) 감독은 2학년이던 1971년 대광고 2루수로 출전했습니다만, 그다지 주목은 받지 못했습니다. 김 감독은 “그때는 고교팀도 나무 배트를 사용해 알루미늄을 쓰는 요즘 선수들보다 타격의 정확성과 정교함이 뛰어났다”고 말했습니다.


 


▶1972년

첫번째 열린 대통령배 대회에서 경북고가 우승하면서 ‘3년연속 우승’이란 대기록을 세웠지만, 청룡기부터는 군웅할거 시대로 돌입했습니다.

타자의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는 슬로커브가 일품이었던 중앙고 윤몽룡(尹夢龍) 투수는 청룡기 결승전에서 우완 황규봉(黃圭奉)과 좌완 이선희(李善熙)가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경북고를 4대1로 KO시켰습니다. 당시 윤몽룡(尹夢龍)의 변화구에 헛스윙만 해대는 경북고 타자들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황소'라는 별명처럼 정통파 강속구 투수인 황규봉(黃圭奉)은 고려대 1학년인 197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뽑혀 출전했으나 투숙 호텔에서 불이 나 뛰어내리다가 부상을 당하면서, 이후의 선수생활이 그리 화려하지는 못했습니다.


어쨌든 윤몽룡(尹夢龍)은 여세를 몰아 봉황기에서는 배명고와의 결승전까지 올라가 4번 타자로서 직접 만루홈런을 터뜨리는등 투타에서 맹활약했지만 계속된 완투로 8회에 무너지며 5대7로 역전패, 준우승에 그치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지요. 당시 윤몽룡(尹夢龍)의 만루홈런이 파울볼이 아니냐는 배명고의 항의 때문에 경기가 1시간 가까이 지연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윤몽룡(尹夢龍)은 고교졸업후에 건국대로 진학했고 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1984년 뜻하지 않게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 야구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작고한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의 아들이며 대한야구협회장을 지낸 정몽윤(鄭夢允) 현대해상화재 회장은 중앙고 재학 시절, 같은 학년 최고 스타였던 윤몽룡(尹夢龍) 선수의 플레이에 반해 ‘도시락을 싸들고’ 야구장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1999년에 발간된 ‘한국야구사’란 책은 1972년을 ‘고교야구 전국시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서울과 영남세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던 고교야구에 호남세가 합류, 그 인기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산상고는 그해 ‘역전의 명수’란 애칭을 얻으며 고교야구의 전국시대를 연 주인공이자 호남야구의 기수였습니다.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군산상고에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문 부산고의 편기철(片基哲) 투수는 통한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1대4로 뒤진 9회말, 군산상고가 한꺼번에 4점을 뽑아 승부를 뒤집었으니 말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TV를 지켜보던 저에게 그날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드라마였습니다. 당시 군산상고의 스마일 투수 송상복(宋相福)은 결승전에서 무려 12안타를 맞았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더욱 싱긋 웃음을 지었습니다. 아마 그런 여유가 역전승을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송상복(宋相福) 투수는 훗날 군산시의회 의원도 지냈다고 하는군요. 군산상고에는 당시 홈런타자인 김봉연(金奉淵)·김준환(金準桓)·김일권(金一權)·양종수(楊宗秀) 등 한방 나가는 슬러거들이 많았지요. 그날 군산상고가 우승하기까지의 사연을 주제로 한 ‘자, 지금부터야’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한국야구사의 최고 홈런타자인 김봉연(金奉淵)은 현재 충북 음성군에 있는 극동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지요. 학교 홍보실장 역할도 맡고 있다고 합니다.


#사진3


 


▶1973년

기동력을 앞세운 대구상고가 청룡기를 제외한 3개 중앙 대회를 휩쓴 한해 였습니다. 청룡기 대회의 경우 대구상고가 대구경북 예선에서 대건고에 패배해 탈락했으니까 망정이지, 아마 본선에 진출했다면 청룡기마저 우승했을지 모릅니다. 당시 대구상고는 강태정(姜泰貞) 신임 감독이 전 선수의 도루요원화를 시도, 타자가 1루에만 진출하면 무조건 도루를 시도하는 기동력과 조직력으로 상대 팀의 허를 찔렀습니다. 박기수(朴基洙)·석주옥(石柱玉)·김한근(金漢根)으로 이어지는 투수진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지만, 인해전술 투수 전략으로 상대 팀을 혼란에 빠뜨리는게 강 감독의 전략이었습니다. 투수력에 비해 막강했던 타격쪽은 상대 팀에 따라 타순을 현란하게 바꾸어 상대방을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2학년생인 장효조(張孝祚)·이승후(李承候)·신승식(申勝湜)·김한근(金漢根)에다 3학년인 신춘식(申春湜)·유기봉(柳基鳳)·허욱(許旭) 등이 가세하는 타선은 장타는 아니었지만 정확성을 자랑했습니다. 사실 대구상고가 3개 대회를 우승하는 동안 홈런은 단 한개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장효조(張孝祚)는 대회때마다 5할에 가까운 타율을 자랑하며 ‘안타 제조기’란 별명과 함께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밖에 경남고의 186㎝ 장신 4번 타자로 청룡기 우승의 일등공신인 김용희(金用熙), 배재고의 ‘고무팔’ 철완투수 이광은(李光殷)과 강한 어깨에 초고교급 포수로 유명했던 신언호(申彦皓), 부산고에서 이적하려다가 법적 시비가 붙어 많은 게임에 출전을 하지 못했지만 한일 고교야구 국가대표전에서 인상적인 피칭을 했던 배재고의 초고교급 정통파 투수 하기룡(河基龍), 대구 대건고의 좌완 강속구 투수인 권영호(權永浩), 군산상고의 도루왕 김일권(金一權), 평소 교타자였지만 한일 고교야구전에서는 일본의 괴물투수 에가와로부터 홈런을 뺏아낸 중앙고의 유대성(兪大成) 등도 모두 1973년의 스타들이었습니다.


#사진4#: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생활을 할때 장효조 선수의 모습>




▶1974년

대구상고의 2년 연속 전국제패 시도에 동향인 경북고가 다시 제동을 건 한해입니다. 대통령배 결승에서 대구상고는 동향인 경북고에 1회에만 10점을 내주는 수모를 당하면서 4대13으로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대구상고는 이미 스타 대접을 받기 시작한 장효조(張孝祚)·이승후(李承候)·신승식(申勝湜)·김한근(金漢根)의 호화 타선은 막강했지만 1973년과 마찬가지로 변변치 못한 투수진이 약점이었습니다. 훗날 대스타가 된 김시진(金始眞) 투수는 이때만 해도 포항중학교를 갓 졸업한 1학년생으로 벤치에 앉아 있었지요.


대신 경북고는 4번 타자이자 포수인 장정호(張正好)와 유격수인 정진호(丁震鎬) 정도를 제외하면 뚜렷한 스타 플레이어가 없는데도 조직력과 짜임새로 대통령배 우승과 청룡기 우승을 잇따라 차지했습니다. 이동수(李東洙)와 성낙수(成洛秀) 등 빈약한 투수진을 팀워크로 극복한 셈이지요.


하지만 대구상고는 봉황대기에서 사이드암 투수인 김성길(金誠吉) 등이 이끈 재일동포팀을 10대5로 누르고 다시 우승을 차지하면서 막강 타력을 과시했습니다.

1974년엔 70년대초까지만 해도 잠잠하던 광주 야구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는데, 특히 광주일고의 2학년 투수인 강만식(姜晩植)은 묵직하고 위력있는 정통파 투구를 선보이면서, 쓸만한 투수가 없다던 1974년의 고교야구계에 단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49년 광주일고(당시에 광주서중)를 청룡기 정상에 올린 김양중(金洋中) 이후로 광주일고 전성시대를 알리는 강만식(姜晩植)의 등장이었습니다. 


▶1975년

광주 야구가 본격 부활을 선언한 해입니다. 정말 입추의 여지가 없이 관중들이 꽉 찬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광주일고 4번 타자 김윤환(金潤煥)은 경북고 성낙수(成洛秀) 투수를 상대로 3연타석 홈런을 때리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모두 좌측 펜스위에 꽂히는 홈런이었습니다. 성낙수(成洛秀) 투수는 당시 “설마”하고 오기로 던졌는데 김 선수가 계속 신들린듯 똑같은 코스에 처박아 넣었다는군요. 사실 성낙수(成洛秀) 투수는 변화구에 능했던 반면, 구질이 매우 가벼운 편이어서 장타를 많이 맞은 편입니다. 그날 경북고 타선은 강만식(姜晩植)의 묵직하게 파고드는 강속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승부는 6대2.

광주일고는 1번 심상수(沈相守) 2번 차영화(車榮華) 3번 이기종(李基鍾) 4번 김윤환(金潤煥) 5번 강만식(姜晩植) 등으로 이어지는 짜임새있는 타선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2루수 차영화(車榮華)는 차분하고 빼어난 수비로 야구전문가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광주일고의 우승은 호남 고교팀으로서는 6·25이후 처음 결승 진출이었고, 우승 역시 1949년 광주서중의 청룡기 우승이후 26년만의 경사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후 강만식(姜晩植) 투수는 부상을 당해 제대로 마운드에 서지 못했고, 고교를 졸업한 뒤에도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투수에게 한번 닥친 큰 부상이 얼마나 결정적인 충격을 주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경북고는 이어 열린 청룡기와 봉황기에서 모두 우승을 거두어 체면치레는 했지만, ‘김윤환(金潤煥)의 3연 타석 홈런’ 기록은 지금도 경북고 야구사에 가슴아픈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경북고의 4번 타자 겸 포수인 손상득(孫祥得)은 팀이 청룡기에 우승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단 한개의 안타도 치지 못하는 극도의 부진을 보여 화제가 됐습니다. 청룡기 준우승팀은 선린상고였지요. 1학년 사이드암 투수인 이길환(李吉煥)이 역투했지만 경북고에 0대3으로 완패당하고 말았습니다. 경북고는 봉황기 결승전에서도 두뇌파 조규식(曺圭植) 투수가 마운드에서 활약한 대구상고를 물리치고 우승했습니다. 경북고 클린업 트리오에서 활약하던 왼손타자 장성규(張聖圭) 선수는 외다리 타법을 선보이며 봉황기 최우수선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편 전국 대회 우승·준우승팀을 대상으로 연말에 개최하는 전국 우수고교 초청대회에서는 드디어 경남고의 2학년 투수 최동원(崔東原)이 화려한 등판을 하게 됩니다. 고교최강이라던 경북고를 노히트노런으로 격파하고, 이튿날 선린상고전에서도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지요. 1976년에 벌어질 최동원(崔東原)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피칭이었습니다.




#사진5#


<사진설명: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시절 상대방을 삼진으로 잡고서 포수인 한문연과 함께 좋아하는 최동원.>


 


▶1976년

1975년 겨울. 대한야구협회는 국가대표 상비군을 선발하면서 경남고 최동원(崔東原), 대구상고 김시진(金始眞), 군산상고 김용남(金勇男), 부산상고의 잠수함 투수 노상수(盧相守) 등 4명의 고교 2년생들을 과감하게 발탁했습니다. 이들 4명은 1976년 고교야구계에서 각각 우승이나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대통령배 결승전에서는 장신에서 내리꽂는 강속구가 일품이었던 김용남(金勇男) 투수와 3루수 겸 릴리프 투수를 하던 2학년생 김성한(金城漢)이 이끄는 군산상고가 대구상고와 격돌했습니다. 대구상고에는 초고교급 투수로 분류되던 김시진(金始眞) 투수와 4번 타자 겸 릴리프 투수인 송진호(宋鎭浩), ‘헐크’란 별명의 홈런타자 이만수(李萬洙)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군산상고는 빠른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하는 김시진(金始眞)에게 눌려 단 2안타 밖에 때리지 못했지만, 9회에 터진 김종윤(金鍾潤)의 결승타로 1대0으로 이겨 우승을 차지합니다. 정말 대형 정통파 투수들끼리의 볼만한 전쟁이었지요. 김용남(金勇男)과 김시진(金始眞), 두 사람은 이후 한양대에 진학해서도 같이 투수생활을 했는데, 대학시절이나 프로시절이나 모두 김시진(金始眞)에 비해 김용남(金勇男)은 별로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두 선수의 공 스피드는 비슷했는데, 김시진(金始眞)이 슬라이더에 강점을 보인 반면, 김용남(金勇男)은 뚜렷한 결정구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사진5#


<사진설명: 삼성 라이온즈 시절의 김시진 투수>




하지만 군산상고는 6월20일 열린 청룡기 최종결승전에서는 경남고의 초고교급 투수인 최동원(崔東原)에게 5대0으로 12개의 삼진에 단 2개의 안타로 농락을 당해야만 했습니다.(당시 청룡기에도 패자부활전 제도가 있었는데, 최동원(崔東原)은 최종결승전에 앞서 열린 승자결승전에서는 군산상고와 맞붙어 20개의 삼진을 기록했음)

177cm에 73kg의 체구인 최동원(崔東原)은 금테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눈빛과 발과 팔을 높이 치켜들고 던지는 다이내믹한 투구 폼으로 팬들을 휩쓸고 다녔습니다. 로진 백을 툴툴 털고, 검정색 야구 스타킹을 잡아당긴뒤, 안경을 한번 고쳐만진 후, 한쪽 어깨를 가볍게 돌리는 몸동작을 마치 의식처럼 했지요. 타자와 정면승부를 거는 시원시원한 강속구에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뚝떨어지는 드롭성 변화구로 타자들을 마음껏 요리했고, 게임당 10개 이상의 스트라이크아웃은 기본이었습니다. 특히 강타자를 만나면 시속 80㎞도 안되는 ‘아리랑 슬로커브’를 던지며 약을 올리는 대단한 승부사였습니다.

이후 선동열(宣銅烈)과 더불어 한국야구 최고의 투수로 대활약을 벌였던 최동원(崔東原)이건만, 요즘엔 이따금씩 TV의 개그 프로에 나와 썰렁한 유머를 내놓는 모습을 보면 웬지 안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최동원(崔東原)은 90년대 중반에는 스포츠 캐주얼 의류인 ‘안티구아 코리아’를 친구와 함께 공동설립하여, 패션사업계에도 뛰어든 적이 있다고 하는군요.

1976년에는 선린상고의 2학년생 언더핸드 투수인 이길환(李吉煥)은 변화구로 그라운드를 누볐습니다. 그는 인천고와의 봉황기 준결승전에서 1대0완봉승을 거두며 결승전에 올랐으나, 부산상고의 좌완 이윤섭(李閏燮) 투수와 맞붙어 0대4로 완패하고 말았지요.

1976년에 야구부를 창설한 신일고는 창단 첫해에 황금사자기를 거머 쥐었습니다. 신일고에는 당시 1학년 괴물투수인 우완 김정수(金貞洙)를 비롯, 스마트한 얼굴의 왼쪽타자인 박종훈(朴鍾勳), 대형타자인 김남수(金男洙)와 김경훈(金炅勛) 등이 맹활약을 벌여 선린상고를 6대0으로 격파하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전체적으로 1976년에는 훌륭한 투수들은 즐비했던 반면, 상대적으로 타자들중에는 대어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1977년

1976년에 이어 1977년에도 2개 이상의 전국대회를 우승하는 팀이 사라지면서 평준화 바람이 거세졌습니다.

우선 대통령배 대회에서는 뜻하지 않게 공주고가 부산고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공주고는 오영세(吳英世) 투수와 김경문(金卿文) 포수가 호흡을 척척 맞추면서, 2학년 두뇌파 투수인 양상문(楊相汶)이 이끄는 부산고의 추격을 4대3으로 따돌렸습니다. 충청도팀으로서는 처음으로 고교정상에 올라 역사의 한 획을 그었지요.


전통의 대구상고는 발을 하늘처럼 높이 들면서 쾌속구를 던지던 박영진(朴英辰) 투수를 중심으로 타격에서는 ‘헐크’인 이만수(李萬洙), 유격수 오대석(吳大錫)이 클린업 트리오를 이루면서 청룡기에서 동산고를 7대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사진5#


<사진설명: 청룡기 대회 우승후 동문에게 업혀 기뻐하는 이만수 선수>




지금 SK 감독을 맡고 있는 조범현(曺凡鉉)이 포수로 활약한 충암고는 1977년 봉황기에서 광주 진흥고를 누르고 우승했습니다. 물론 당시 충암고 우승의 주역인 기세봉(奇世峯)·이근식(李根植)·조범현(曺凡鉉) 등은 모두 해체된 대구 대건고에서 전학해간 선수들입니다. 충암고에는 키큰 이근식(李根植)과 키작은 이근식(李根植)이란 동명이인이 선수로 뛰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공교롭게 둘다 좌완이었습니다.

황금사자기에서는 광주상고(지금은 동성고로 이름을 바꾸었음)가 우승의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광주상고는 장타자 김종모(金鍾模)를 필두로 투수 김대식(金大植), 유격수 박상진(朴商珍) 등의 활약으로 인천고를 연장접전 끝에 3대2로 물리치고 재창단 7년만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3학년이던 김종모(金鍾模) 선수는 후배들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며 팀 워크를 다졌고, 후배들은 감독보다도 김 선수를 더 무서워 했다고 합니다.


 


#사진6#


<사진설명: 군산상고 1학년때 김성한의 모습. 새벽4시부터 일어나 타격연습을 했다고 한다.>




한편 특유의 타격 폼 때문에 ‘오리 궁둥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김성한(金城漢)은 1976년부터 군산상고의 3루수 겸 투수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1977년에는 대구상고의 이만수(李萬洙)와 쌍벽을 이루는 장타자로 인기를 누렸습니다. 김성한(金城漢)은 투타에 모두 능했으니 야구천재란 소리를 들을만 합니다. 하지만 군산상고는 이 해에 결승전에 한번도 오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1978년

부산고의 두뇌파 좌완투수 양상문(楊相汶)과 포수인 김호근(金鎬根) 배터리가 주축을 이루면서 대통령배에서 대구상고를 2대0으로 눌렀습니다. 대구상고에는 양일환(梁日煥)이란 3학년생 사이드암 기교파 투수가 있었는데, 결승전에서 7회까지 양팀은 0의 행진을 벌이다가 8회에 김호근(金鎬根)의 3루타로 2점을 내면서 승부를 결정지었습니다.

부산고는 청룡기에서도 경북고를 7대0으로 제압하면서 2관왕에 올랐습니다.

아마 제가 생각하기로 국내 야구선수들중에서 가장 지성적이고 머리가 좋기로는 양상문(楊相汶) 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최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양 감독은 자신의 실력으로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사진설명: 양상문 선수가 고교시절 자신의 기사를 스크랩해놓았다.>봉황기에서는 장타자인 김영균(金泳均)과 좌완투수 윤수봉(尹秀奉)이 이끄는 서울고가 선린상고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는가 했더니, 황금사자기에서는 초고교급 투수인 김정수(金貞洙)가 이끄는 신일고가 서울고를 누르고 우승을 각각 차지했습니다. 물고 물리는 현상이었지요. 무쇠팔 김정수(金貞洙) 투수는 고교를 졸업한뒤 고려대를 거쳐 프로야구팀 MBC 청룡에서 활약하다가 교통사고로 요절, 야구 팬들을 아쉽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전국대회 우승은 못했지만 광주일고의 미남 3루수 이상윤(李相潤)은 시즌 도중 투수로 전향, 불같은 강속구를 던져대면서 양상문(楊相汶)을 능가하는 최고 투수란 평가를 받았지요. 그해 열린 세계 청소년 야구대회에 나가서도 이상윤(李相潤)이 에이스로서 가장 뛰어난 피칭을 했답니다.


 


▶1979년

그야말로 혼전이었습니다. 1979년 최고 비운의 스타는 봉황기와 황금사자기에서 모두 준우승에 머문 인천고의 정통파 투수인 최계훈(崔桂勳)이었습니다. 140㎞를 웃도는 위력있는 공을 가지고 있었지만, 승리의 여신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봉황기에서 인천고는 광주상고와 결승전에서 격돌했습니다. 2년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도 만난 적이 있던 양 팀이지요. 광주상고는 언더핸드 투수인 윤여국(尹汝國)과 이군로(李軍魯), 이순철(李順喆·현재 LG트윈스 감독) 등을 앞세워 5대0 완봉승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윤여국(尹汝國) 투수는 특유의 흐느적 거리는 모션으로 밑에서 던지는 ‘오징어 잠수함’ 피칭을 통해 현란한 싱커를 구사하면서 혼자서 6게임을 완투하는 철완을 과시했습니다.

황금사자기에서도 인천고는 역시 언더핸드 투수인 진동한(陳桐漢)과 유격수 김성래(金聲來)등이 이끄는 경북고에 0대1로 분루를 삼켜야 했습니다. 최계훈(崔桂勳)이 벤치에서 흘린 눈물을 야구팬들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1979년의 신데렐라는 뭐니뭐니해도 역시 선린상고의 1학년 박노준(朴魯俊)이었습니다. 광주일고 2학년 선동열(宣銅烈)만 해도 꽤 기대되는 유망주였지만, 박 선수의 인기에는 못미쳤습니다.

현재 SBS에서 야구해설위원을 맡고 있는 '젠틀맨' 박노준(朴魯俊)은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이전, 국내 고교야구 열기의 마지막 최고 스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좌완인 박노준(朴魯俊)은 선린상고의 에이스 투수에 정확한 방망이와 빠른 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출전하는 경기는 관중석이 꽉꽉 찼고 암표가 성행했습니다. 단발머리와 갈래머리를 딴 여고생들이 몰려들면서 ‘오빠부대’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노준(朴魯俊)은 1979년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부산상고의 대선배인 윤학길(尹學吉)과 맞붙어 15대1로 압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3학년인 좌완 윤석환(尹錫環) 투수가 적지않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팬들은 “박노준, 박노준”만 외쳤습니다. 선린상고로선 이길환(李吉煥) 이후 계속되던 ‘준우승 신화’를 씻어버린 것이지요. 박노준(朴魯俊)의 인기에 힘입어 동기인 김건우(金健友)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갔습니다. 박노준(朴魯俊)은 청룡기 결승전에도 올랐지만 아쉽게도 부산고에 5대2로 져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박노준(朴魯俊)은 이듬해인 1980년10월4일 광주일고의 선동열(宣銅烈)과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격돌, 3대2로 간신히 앞서고 있던 8회말 승리를 굳히는 투런 홈런을 뽑아냈고 또 5회부터는 직접 마운드에 올라 2안타 1실점으로 자신의 결승점을 지켜내 영웅이 됐습니다. 결국 박노준(朴魯俊)과 선동열(宣銅烈)의 고교시절 역사절 대결은 선린상고가 5대3으로 승리한 가운데, 박노준(朴魯俊)이 선동열(宣銅烈)에게 4타수3안타에 홈런1개 타점 3개를 뽑아낸 결과를 낳았지요.


 


#사진7#


<사진설명: 일본 주니치에서 뛸때 선동열의 투구 모습>


 


하지만 박노준(朴魯俊)의 신화는 1981년들어 이상하게 왜곡됩니다. 1981년 대통령배에서 우승후보 선린상고는 1회전에서 진흥고의 좌완 김정수(金正洙)에게 2대0으로 느닷없이 덜미를 잡혀 불길한 조짐을 보이더니, 청룡기에서는 경북고와 연장전까지 가는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6대5로 패했지요. 봉황기 결승전에서는 경북고와 다시 맞붙었는데 1회에 경북고 좌완 성준(成埈)을 난타하는 가운데 이경재(李敬宰)의 적시타로 박노준(朴魯俊)이 홈으로 들어오면서 슬라이딩을 하다가 발목을 접지르는 대형 부상을 당하면서 병원으로 실려가고 말았습니다. 전국 여고생들이 통곡하는 날이었습니다. 박을 대신하여 우완 강속구 김건우(金健友)가 마운드에 올랐지만, 이미 전열이 흐트러져 버린 선린상고가 경북고를 이기기는 힘들었겠지요. 경북고 1학년 잠수함 투수 문병권(文炳權)은 다가오는 봉황기를 여유있게 붙잡고 모교에 넘겨주었습니다.


 


 


<사진설명: 박노준이 1981년8월26일 경북고와의 결승전에서 1회 홈으로 들어오다가 발목을 접지르는 순간.>


 


박 해설위원은 최근 어느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1981년8월26일. 생일은 까먹어도 이날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이제는 흑백사진 속에 앨범에 묻혀버린 23년 전의 일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일이 더욱 생생해진다. 아직도 야구해설가라기 보다 ‘비운의 고교스타’로 나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올드팬들을 위해 그 때의 심경과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싶다. 돌이켜보면 24일 4강전에 이어 예정돼 있던 25일 결승전이 비로 하루 순연된 것이 불운의 전조였다. 선발로 나와 경북고의 1회초 공격을 가볍게 막은 뒤 1회말 적시타를 때리면서 기세를 올린 나는 5번 이경재의 적시타 때 홈으로 뛰어들었다. 볼이 포수 뒤로 빠지는 줄도 모르고 포수를 피하기 위해 사이드 슬라이딩을 하는 순간 왼쪽 발 스파이크에 붙어있는 쇠징이 땅에 박히면서 발목이 돌아가고 말았다.그 상황에서도 나는 홈플레이트를 밟아야 한다는 일념에 엉금엉금 기어서홈 플레이트를 찍은 뒤 쓰러져 버렸다. 엄지발가락이 뒤로 돌아가 복숭아뼈의 바깥쪽 두 군데가 부러졌고 안쪽에 있는 인대는 모두 끊어져 15㎝의 철심과 나사로 고정시키고 인대를 잇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결승전 전날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먼지를 일으키며 멋들어진 슬라이딩 장면을 보여줄 상황이었지만 물먹은 모래땅이라 미끄러지지 않았다. 그 이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 아득한 통증과 함께 화려하던 나의 고교야구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재활의 고통을 통해서 나는 절망을 이기는 법을 터득했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습니다.


 


이상 70년대 고교야구 스타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는데, 대체로 경북고 남우식(南宇植)의 신화로 시작하여 선린상고 박노준(朴魯俊)의 인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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