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북한에 억류됐다 작년에 풀려난 한국계 미국인 김동철 목사가 자신이 북한에 체류하던 내내 미 중앙정보국(CIA)과 한국 국가정보원을 위해 정보수집 활동을 했다고 고백했다.
김 목사는 북한 전문매체 NK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보기관들은 탈북자들이 제공한 정보가 불완전하다고 봤다"면서 "그들은 내게 북한 내부에서 '안테나' 역할을 하도록 요구했다"고 말했다.
미 정보당국은 김 목사에게 북한의 군사 동향과 핵 프로그램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제공해달라고 했다. 한 CIA 요원은 그에게 "당신은 미국 시민인 만큼 미국도 당신의 조국"이라면서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고 설득했다. 한국 정보기관 또한 김 목사에게 출신 국가를 위해 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김 목사는 이에 많은 내적 갈등을 겪었지만 이미 해외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김책공대 핵물리학 교수로부터 99.999% 농축 아연 주괴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김 목사에게 이 물질을 건네며 "핵무기 생산과 미사일 개발에 필수적인 물질"이라고 했다.
198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한 김 목사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고 전 재산인 260만달러를 투자해 북한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라선경제특구에서 두만강호텔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2007년과 2009년, 2011년에는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북한 당국의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며 북한 통일전선부로부터 일정 직위를 부여받고 해외 업무를 하기도 했다.
한미 정보기관이 핵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김 목사는 북한이 언제 핵분열을 시작했는지, 어디에 핵물질을 비축했는지, 핵물질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와 북한이 추가로 필요한 물질을 어떻게 생산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를 위해 김 목사는 통일전선부 직위를 이용해 북한 고위급 인사와 과학자들을 접촉했다. 어려운 경우에는 평양과 청진, 혜산, 라선에서 비밀 요원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파일과 사진 등 다양한 형태로 CIA에 넘겨졌으며, 김 목사는 이런 정보를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정보기관으로부터 전문 요원처럼 일하도록 훈련도 받았다. 특별 장비도 얻었다.
김 목사는 NK뉴스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장착된 시계로 영상을 찍었고, 전자기파 감청 장비를 이용해 세세하게 도청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은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당시 아날로그 방식을 사용했고 이 때문에 북한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첨단 장비로 포착할 수가 없었다고 김 목사는 설명했다.
비밀 요원들과의 교류는 극비리에 이뤄졌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공개로 국정원 직원들과 만나 비밀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김 목사는 북한 당국에 덜미를 잡혔다. 그는 "하룻밤사이에 난 반역자가 돼서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혔다"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구타를 당했고 여덟 차례나 물 고문을 당했다. 북한 당국은 온갖 특이한 방법으로 그를 고문했다고 한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지만 당국의 감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김 목사는 풀려난 지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물고문과 영양실조 후유증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다.
김 목사는 지난해 5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을 계기로 김상덕씨, 김학송씨와 함께 미국으로 송환된 한국계 미국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 목사의 발언과 관련, CIA와 미 국무부, 국정원 등은 NK뉴스의 확인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