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5만t 분량 쌀포대 130만 장 이미 제작
WFP에 사업관리비용 140억여원 송금도
북한은 석달 째 남한 쌀 수령 입장 없어통일부가 대북지원을 위한 국내산 쌀 5만t 분량의 쌀 포대 130만 장을 지난달 제작한 것으로 16일 확인됐다. 북한이 석달 째 남한 쌀 수령을 거부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쌀 포대를 미리 만들어놓고 적잖은 예산을 지출한 것이다.
정부 관계자와 유민봉 자유한국당 의원실 등에 따르면 정부는 40㎏짜리 쌀 포대 130만 장 제작에 예산 8억원을 집행했다. 아울러 국내쌀 5만t을 정부 대신 북한에 전달하기로 한 유엔세계식량계획(WFP)에 사업관리비용 명목으로 1177만 달러(약 140억원)를 송금한 사실도 확인됐다.
쌀 포대 비용 8억원은 농림축산식품부의 양곡관리특별회계에서, WFP에 지급한 1177만 달러는 통일부의 남북협력기금에서 지출됐다.
그러나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16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업무보고에서 WFP를 통한 식량 지원과 관련 “북측의 (국내쌀 수령에 대한) 공식입장이 확인되지 않아 준비 절차를 잠정 중단했다”고 말했다. 쌀 포대 제작과 WFP 등에 총 148억여원의 예산을 집행했지만, 김 장관은 이 부분은 언급하지 않은 채 '잠정 중단' 부분만 확인한 것이다. 김 장관은 “향후 북측 입장을 확인한 뒤 필요한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현재로선 대북 쌀 지원이 언제 진행될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당초 목표로 한 9월 말 완료에 대해서는 예정된 일정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현재 WFP와 북측의 실무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지난 6월 19일 대북 식량지원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식량난을 감안해 춘궁기인 9월 내 쌀 전달을 목표로 잡았다. 이에 따라 1277억여원의 예산 심의·의결이 신속하게 처리됐다. 그런데 9월 내 전달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당초 정부가 밝혔던 쌀 지원 명분도 약화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은 지난 7월 말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빌미로 WFP에 남한 쌀 수령 거부 의사를 내비친 뒤 지금까지 이렇다할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 노동신문은 이날 추수에 들어갔음을 대외에 알렸다. 신문은 ‘가을걷이와 낟알털기에 역량을 집중해 적기에 끝내자’는 사설을 싣고 주민들에게 알곡 수확을 독려했다. 이에 북한의 국내쌀 수령 가능성이 더욱 낮아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국내쌀 수령 의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쌀 포대를 미리 만들고, 쌀 전달 이전에 WFP에 사업비를 지급한 것과 관련해 정부의 예산 집행이 너무 성급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통일부는 WFP에 지급한 1177만 달러에 대해 “국내항에서 북한항까지 수송, 북한 내 분배 및 모니터링 비용 등 명목”이라고 유 의원실에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유 의원은 “북한의 쌀 수령 의사를 확인하고 지급하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며 “쌀 포대도 1~2주면 제작이 가능한데 서둘러 예산을 지출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정부 당국자는 “현재 쌀 운송 선박 계약, 쌀 도정 등이 진행되지 않아 집행된 예산 규모가 크지 않다”며 "쌀 포대 제작업체와의 계약 절차에 따라 최대한 늦춰 제작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아직 9월 중순인 만큼 북한 입장 확인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은 비핵화협상에서 남한은 빠지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칫 남북관계 진전으로 비칠 수 있는 쌀 수령을 거부하는 것 같다”며 “또 6월 방북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대규모 식량지원을 북한에 약속해 국내쌀 필요성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