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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happykingdoom1004 | 2020.03.20 | 조회 430 | 추천 1 댓글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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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드.리어왕.햄릿.오델로로 유명한 4대비극 작가인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갑자기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개인적으로 신비의 인물 같아요. 혹자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던데 저는 실존인물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 같네요. ^^윌리엄 셰익스피어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서양문학의 비조로 여겨지는 호메로스와 비슷한 점이 많다. 역사상 최고의 작가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생애가 온통 의문투성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오늘날 수많은 셰익스피어 ‘전기’가 누군가의 말마따나 “5퍼센트의 사실과 95퍼센트의 억측”으로 이루어진 것도 그런 연유다. 두툼한 전기 한 권을 읽음으로써 얻는 보람이라곤 우리가 그에 관해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를 실감하는 것뿐이다. 심지어 앤서니 홀든의 흥미진진한 셰익스피어 전기는 “뛰어난 셰익스피어 전기란 있을 수 없다”는 말로 시작될 정도다. 그나마 확실한 사실 몇 가지만 정리하자면 이렇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16세기 중반 영국 남부의 작은 마을 스트래트퍼드어폰에이번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일은 모르고 1564년 4월 26일에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기록만 있다. 부친은 장갑제조업자였으며 그 지역에서는 제법 유지로 행세한 인물이었다. 아쉽게도 셰익스피어의 유년기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고,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18세 때인 1582년에 여덟 살 연상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해서 1583년에 딸을, 1585년에 아들과 딸 쌍둥이를 낳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1585년부터 1592년까지는 셰익스피어의 생애에서 이른바 ‘잃어버린 시절’이다. 일각에서는 이름의 철자 및 의미가 유사한 ‘윌리엄 셰익섀프트’(William Shakeshafte)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그가 이 시기 동안 영국 북부에서 배우로 일했다고도 추정하지만 물론 확증은 없다. 셰익스피어는 1580년대 말쯤에 런던으로 진출해서 극작가 겸 단역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594년에는 새로 설립된 ‘시종장관 극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1599년에는 극단 동료들과 함께 신축한 글로브 극장의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 1603년에 즉위한 제임스 1세의 후원 하에서 ‘시종장관 극단’은 ‘국왕 극단’으로 명칭을 바꾸고 승승장구했다. 말년에 셰익스피어는 ‘신사’(젠틀맨)로 인정받아 가문의 문장(紋章)을 만들 정도로 저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1616년 4월 23일에 52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탄생일과 사망일이 똑같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여기 덮인 흙을 파헤치지 마시오 / 이 돌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 이 뼈를 옮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 고향에 있는 무덤 묘비에 새겨진 이 시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지만 역시 확증은 없다. 셰익스피어의 외모는 잘 알려져 있다. 유명한 [초판 2절판] 작품집에 그의 초상화가 들어있고, 그 원형으로 추정되는 ‘챈도스 초상화’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 묘사된 대머리에 콧수염 기르고 귀고리를 단 남자가 ‘진짜’ 셰익스피어라고는 누구도 장담 못한다. 이것 역시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둘러싼 갖가지 혼란 가운데 하나다. 즉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결코 충분치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위대한 극작가’의 존재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구구한 의문을 만들어낼 정도로 성가시긴 하다.가령 셰익스피어의 ‘이름’만 해도 그렇다. 오늘날은 Shakespeare로 통일되었지만 한때는 Shagspeare, Shakspere, Shakestaffe, Shaxberd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왜? 당시의 영어는 철자법이 제멋대로라서 where를 wher, whair, wair, wheare, were, whear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셰익스피어의 친필 서명 6개도 철자가 전부 다르며, 그중 Shakspere와 Shakspeare는 있어도 Shakespeare는 없다. 심지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서는 지금까지도 Shakspere라는 철자를 고수할 정도다. 오늘날 세계 문학의 거장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지만, 만약 그의 사후에 작품집이 간행되지 않았더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졌을지 모른다. 셰익스피어가 사망한 지 7년 뒤인 1623년에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존 헤밍과 헨리 콘델이 그의 희곡 가운데 18편을 모아서 출간했는데, 이것이 바로 [초판 2절판](퍼스트 폴리오) 작품집이다.물론 그 이전에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간행된 적은 있었지만, [초판 2절판]은 그때까지의 여러 가지 판본을 비교함으로써 오류를 최대한 바로잡은 최초의 비판본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현재 전해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희곡 38편, 소네트 154편, 그리고 장시 2편 등이고, 제목만 전해지는 작품도 있다. ‘희극’과 ‘비극’, 그리고 ‘사극’으로 분류되는 희곡 중에서는 [한여름 밤의 꿈], [말괄량이 길들이기], [폭풍우], [십이야], [베니스의 상인], [로미오와 줄리엣], [리어 왕], [맥베스], [햄릿], [오셀로], [줄리어스 시저] 등이 걸작으로 손꼽힌다. 각 작품의 완성 연도를 정확히 알기는 힘들지만, 전문가들은 이 가운데 [헨리 6세] 1-3부가 맨 처음이며, [헨리 8세]가 맨 마지막 작품인 것으로 추정한다.운문 중 일부는 셰익스피어의 생전에 간행되었다. 장시 [비너스와 아도니스](1593)와 [루크리스의 능욕](1594)은 후원자 사우샘프턴 백작에게 바치는 헌사를 담아 간행되었고, 난해한 알레고리 시 [불사조와 비둘기]는 1601년에 다른 사람의 시집에 수록되었다. 평론가 해럴드 블룸이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을 완벽하게 발휘한 작품”이라고 격찬했던 소네트 역시 그의 생전인 1609년에 간행되었는데, 이 시집의 헌사에 나타난 헌정 대상인 이니셜 W. H.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두고 숱한 해석이 나온 바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관해서는 수많은 연구 논문과 저서가 간행되었다. 지금도 관련 단행본이 대략 하루 한 권씩, 관련 논문이 매년 수천 종씩 나올 정도다. 앤서니 홀든의 말처럼 페미니스트, 마르크스주의자, 포스트모더니스트, 탈식민주의론자 등이 저마다 입맛에 맞게 셰익스피어를 난도질한 지도 오래다. T. S. 엘리엇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갖가지 틀에 맞춰 해석하려는 시도가 워낙 많았으므로, 이제 유일하게 시도되지 않은 방법은 그의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뿐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오늘날 셰익스피어에 관한 연구, 저술, 공연 등의 활동은 엄연히 하나의 ‘산업’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에 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아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과대평가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물론 이런 비판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으니, 가령 셰익스피어에 관한 최초의 기록 가운데 하나도 험담이었을 정도다. 볼테르와 톨스토이도 셰익스피어를 깎아 내렸으며, 현대의 저명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도 “셰익스피어는 다른 사람이 이미 쓴 내용을 뒤따라 썼을 때에만 진정으로 훌륭한 극작가”라고 비아냥거린 바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비판도 일리가 있다.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희곡 가운데 순수한 창작은 몇 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개는 당대에 널리 알려진 여러 소설이나 희곡을 각색한 내용이었고, 때로는 남의 작품에서 특정 구절을 그대로 베낀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셰익스피어가 당대에도 종종 ‘표절 작가’로 비난을 받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만 해도 표절이나 모방은 비교적 흔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지닌 독보적인 예술적 가치를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사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위대함뿐만이 아니라 그 진부함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때 인기만점의 통속극이었던 그의 희곡이 오늘날은 대중과 멀어진 채 상아탑에서 일종의 ‘경전’으로 취급되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왕가’를 ‘재벌가’로 바꿔놓기만 해도, [햄릿]이나 [리어 왕]이나 [맥베스]는 오늘날 웬만한 영화나 드라마 못지않게 우리에게 친숙한 줄거리다. 만약 지금 당장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가지고 연속극을 만들어도 웬만한 드라마보다는 더 낫지 않을까. 적어도 그 대사마다 ‘명대사’ 아닌 것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셰익스피어 당시에만 해도 영국에서는 공문서나 학술서를 라틴어로 작성했고, 심지어 최초의 ‘영어 문법책’조차도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1611년에 간행된 ‘흠정역 성서’(킹 제임스 성서)와 함께 영어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셰익스피어는 ‘신조어’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 사용된 단어는 약 2만 개인데 그중 신조어가 약 2천 개에 달한다. “가령 우리가 입만 열었다 하면 열 마디 가운데 한 마디는 신조어라고 생각해 보라.” 빌 브라이슨의 말은 셰익스피어의 언어적 천재성을 한 마디로 요약해준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갖가지 표현은 오늘날 영어에서 관용어구로 자리잡았다. 가령 “살과 피”(flesh and blood, 혈육), “마음의 눈”(in the mind's eye, 기억), “더러운 행실”(foul play, 반칙) 등이 그렇고, “지나간 것들의 기억”(remembrance of things past)과 “소리와 분노”(sound and fury)와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각각 마르셀 프루스트와 윌리엄 포크너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제목으로도 쓰여 더욱 유명해졌다(물론 프루스트의 소설의 영어 제목은 이제 프랑스어 원제에 더 가까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In search of lost time)로 대체되었지만). 셰익스피어의 가장 중요한 업적인 희곡은 중세의 연극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평면적이고 진부한 인물 대신 햄릿, 폴스태프, 이아고, 맥베스 같은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셰익스피어의 등장인물을 가리켜 “그들은 물론 허구의 존재이지만, 그 사실성은 우리의 사실성을 능가한다”고 단언한다. 나아가 셰익스피어는 희극과 비극 모두에서 비교적 고르게 걸작을 남겼다는 점에서 역대의 어느 극작가와도 다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기본적으로 무대 공연을 위한 것이었다. 사후에도 그의 작품은 꾸준히 공연되었고,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과 시도가 이루어졌다. 1879년에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래트퍼드에서는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RSC)이 설립되어 이후 연극 공연과 배우 양성에 기여했다. 특히 [햄릿]은 수많은 배우들의 출세를 보장하는 확실한 등용문으로, 20세기에만 해도 존 배리모어, 존 길구드, 로렌스 올리비에 같은 명배우들이 햄릿을 연기해 격찬을 받은 바 있다. 셰익스피어 원작 영화도 수백 편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헨리 5세](1944)와 [햄릿](1948), 프랭크 제피렐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1968) 등이 유명하다. 가장 독특한 영화로는 일본의 거장 감독 쿠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의 숲](1957)과 [란](1985)이 손꼽히는데, 각각 [맥베스]와 [리어 왕]을 일본 중세 사극으로 각색해 호평을 받았다. 최근에는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작품을 교묘하게 재구성하고 현대적으로 풍자한 코미디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가 아카데미상을 휩쓸며 새삼 이 극작가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다. 사후 수백 년간 문학계에서 셰익스피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벤 존슨은 “그는 한 시대를 위한 작가가 아니라 온 시대를 위한 작가”라고 격찬했고, 괴테는 자신은 셰익스피어의 소유물이 되었다고 고백했고, 빅토르 위고는 “셰익스피어가 곧 연극”이라고 단언했으며, 조이스는 무인도에 떨어질 경우에는 단테보다 셰익스피어의 책을 들고 가겠다고 장담했고, 심지어 버지니아 울프조차도 [자기만의 방]에서 뿌리 깊은 성차별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와 똑같은 문학적 재능을 지닌 누이”에 관한 비유를 든 바 있다. 셰익스피어는 문학 외의 분야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 가운데 한 장면을 묘사한 수많은 그림 중에서는 라파엘전파의 화가 존 에버레트 밀레이가 [햄릿]의 내용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오필리아](1852)가 유명하다. 음악 중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토대로 한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오셀로](1887)와 [폴스태프](1893)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우리 귀에 가장 익숙한 셰익스피어 관련 음악은 아마도 멘델스존이 작곡한 극 부수음악 [한여름 밤의 꿈](1843)에 나오는 ‘결혼 행진곡’이 아닐까. 셰익스피어에 관해 논할 때면 심심찮게 따라붙는 묘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둘러싼 구구한 추측이다. 물론 오늘날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극작가 겸 배우가 16세기 중후반에 영국에서 살았다는, 그리고 오늘날 전해지는 유명한 희곡 및 소네트의 작가라는 데에 대부분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사실은 당대의 다른 인물의 필명에 불과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떠돌아다녔다. 어째서일까? 한편으로는 앞에서 말했듯이 셰익스피어에 관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가 극히 적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막대한 명성을 생각해 보면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록이 그토록 드물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16세기까지만 해도 영국 내에서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기록 보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셰익스피어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당대의 다른 저명한 극작가나 그들의 희곡에 관해서도 상당 부분을 ‘모르고’ 있다. 즉 셰익스피어만 예외는 아니라는 뜻이다.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스탠리 웰스는 셰익스피어의 ‘진짜 정체’를 둘러싼 구구한 주장들이 하나같이 속물근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즉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결코 대단한 이력이나 학력을 지니지 못한 시골 출신의 일개 극작가가 그런 걸작을 줄줄이 써냈다고는 믿을 수 없다는 오만함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이나 명사 가운데서 ‘천재 희곡작가’의 위상에 더 잘 어울릴 법한 인물을 물색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프랜시스 베이컨 가설’은 19세기에 미국의 델리아 베이컨이란 여성이 제기해서 유명해졌다. 십중팔구 본인의 성(姓)도 ‘베이컨’이라는 점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진짜’ 셰익스피어였다는 가설을 내놓은 다음, 거기 어울리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물론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다”라는 근거 없는 주장은 이후 150년이 지난 지금가지도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다. 내친 김에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악명 높은 발언에 관해서도 알아보자. 흔히 제국주의적 망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 말의 원래 맥락은 이랬다. “만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잉글랜드인을 보고 인도와 셰익스피어 둘 중 어느 것을 포기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도야 있든 없든 상관없으나, 셰익스피어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어쨌든 인도 제국은 언젠가는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우리는 셰익스피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박상익 옮김) [영웅숭배론]에 나오는 토머스 칼라일의 이 말은 인도나 인도인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제적 가치’(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보다는 ‘정신적 가치’(셰익스피어)가 더 중요하다는 뜻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인도와 영국의 과거사를 생각해 보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라일의 본의를 왜곡해서는 곤란하리라. 스탠리 웰스는 오늘날 셰익스피어가 지닌 가치를 이렇게 말한다. “셰익스피어를 좋아할 도덕적 의무는 없으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전 세계의 사람들 수백만 명은 그에 관하여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를 전적으로 피하기는 어렵다. 영어에는 그의 작품들에서 유래하거나 관계있는 표현들이 가득 스며 있다. 모든 세대와 모든 장르의 작가와 예술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셰익스피어는 분명 수백만 사람들에게 심미적인 즐거움이고 지적인 자극물이다. 그를 물리칠 길이 없다. 뭐라고 할까. 그는 수도관 속을 흐르는 물 같은 존재다. 수도관은 닳아 버릴지 모르지만, 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이종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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