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쳐 주는 것만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르쳐 줘도 배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1960년대 말, 우리 나라 최북단, 어느 가난한 시골 마을엔 중학교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초등학교 졸업생들은 당연히 부모님의 일을 도우면서 농사를 배웠습니다.
정말 다행스러웠던 건, A씨가 졸업하던 해에 중학교가 생겨서, 진학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당시 최전방 농촌은 생활환경이 열악해서, 우수한 선생님들이 부임해 오시면 오랫동안 근무하지 않거나, 우수하신 분들이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3개월이 지나도 영어 선생님이 오지 않으셔서 다른 과목 선생님이 가끔 가르쳐 주시고, 학생들끼리 사전을 찾아 가며 영어공부를 해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열 서너 살 된 아이들은 읽지도 못하는 책을 펴 놓고 한숨만 짓거나 운동장에 나가 풀만 뜯는 게 영어시간이었습니다. 애 타게 기다리던 중, 부임해 오신 선생님께서는 어리석고 답답한 시골 애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모르셨는지, 학습 진도를 맞추는 것 조차도 힘들어 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설명을 못하시는지. 그 당시 A씨는 어린 마음에도 무척 답답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잘 가르치고 올바르게 설명하는 것도 중요한 능력이라는 걸, A씨는 그 때 알았습니다.
모두 잘 가르치는 선생님들만 계셨다면, 그런 걸 느끼거나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전산실에서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시스템을 개발하고 프로젝트 개발 보고서를 작성하던 B씨는 어느 날 갑자기 인사교육부서로 배치전환이 되었습니다.
근로기준법이나 노동관계법 시행령, 남녀고용평등법 시행규칙을 알지 못하는 공대 출신의 인사과장으로서는 노사관계가 격화되던 90년대 당시에 쉽게 해 낼 수 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게으르거나 권모술수에 능한 상사를 모시고 복잡다단한 노사 교섭을 진행하고, 가 본 적도 없는 유럽으로 신입사원 20여 명을 데리고 배낭여행 겸 거래회사 방문을 떠나는 일은 두려움뿐이었습니다.
능숙하지 않은 영어로, 날고 기는 신입사원들 앞에서 외국인에게 회사 업무를 설명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은 없을 겁니다.
성질 급하고 고집이 센 어른을 모시고 그런 일을 해 내는 몇 년 동안, B씨가 사표를 써 보지 않은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글 맞춤법을 공부하며 옥편과 계산기를 옆에 두고 문서를 기안해야 하는 교육팀장의 체면은 그야말로 휴지통에 쑤셔 넣은 신문지만도 못한 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B씨가 확실하게 느끼는 점은, 정말 유능하고 자상한 상사를 모시고, 모든 걸 고민하지 않고, 직접 찾아 보지 않고,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일을 할 수 있었다면, 간단하고 쉬운 글 한 편 쓰는 게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덤벙대기 잘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버릇을 가진 C씨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하면서 점 하나 제대로 찍지 않아 일주일 동안 밤을 새워야 하고,
숫자 0과 영문자 O를 구분하지 못해 휴일마다 특근을 해야 했던 신입사원 시절, 팀장으로 모신 분은 사내외를 막론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백지에 도표를 그려 가며 대여섯 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설명하는 분이었습니다. 화장실도 가지 않고, 식사도 거르면서 1만개가 넘는 프로그램 문장을 흐름도(Flowchart)로 그리면서 논리적 통계적으로 설명하는 그 분의 치밀함과 철저함에 질린 C씨는, 환하게 웃을 줄 모르는 그 분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화기 계통의 장애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몇 시간을 앉아 있을 수 있는 학습의 인내를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심리적 고통을 안겨 주었던 그 분이었습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하루를 집중할 수 있고, 좋은 어휘를 찾아 내기 위해 두꺼운 책을 쉬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참을성을 훈련시켜 주신 그 분을 C씨는 요즘도 가끔 연락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힘든 농사일을 하기 싫어 도망치듯 올라 온 D씨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친척집과 하숙집, 자취방을 들락 거리며 동가식서가숙 하며 하루 하루를 연명했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던 TV는 D씨에게 차례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가까이 했습니다. 저녁 늦게 논밭에서 돌아 오시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소죽을 끓이면서 가마솥 옆엔 늘 라디오를 켜 놓던 습관으로 서울에 와서도 라디오는 D씨의 친구였습니다.
유행가를 좋아하다가, 영화음악을 즐겨 듣게 되고, 그러다가 세미클래식으로 옮겨 갔습니다. 어쩔 수 없이 라디오만 들어야 했던 3~4년간의 생활환경은 음악의 세계를 다르게 해 주었습니다.
아는 것보다 즐거움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나 봅니다.
15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 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 볼까 하고 E씨가 드나들었던 몇 달간의 미국 생활은 공부하러 갔었던 연수시절의 해외여행과 달랐습니다.
외로움과 두려움이 겹칠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E씨는 글을 썼습니다.
메모하고 싶은 생각이 나거나 기록해야겠다는 욕망이 일어 날 때마다 글을 쓰고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종이와 펜을 항상 가까이 두는 버릇 덕택이었으며, 그 버릇 또한 불확실한 미래를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습니다.
마구잡이로 써 내려가는 짧은 토막의 글에는 반복되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사서 읽는 책의 제목과 내용은 40여 년간 읽어 온 책들과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읽지 않고 쌓아 두었던 책들을 꺼내 살펴 보다가 다시 읽어 보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즐거움도 작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한 두 시간에 작은 글 한 편 쓸 수 있는 건 학창시절에 배운 국어의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십여 년 동안 좋은 글을 모아 온 신문과 잡지의 스크랩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쓸데없이 그런 건 뭣하러 오려 두고 묶어 두느냐고 핀잔을 주던 E씨의 아내는 요즘, 몇 권의 스크랩 자료를 다시 꺼내 보며 강의 준비를 하는 남편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