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싸움을 하지 않는 가정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론이 달라 우리 집은 부부싸움이 잦다. 남편은 최대한의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친구같이 자상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한다. 반면 나는 그가 적절한 규제를 하면서 존경받는 엄격한 아버지가 되어주길 원한다. 엄한 아버지가 있어야 자상한 엄마가 존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갈등은 아이들의 입시를 앞두고 최고조에 달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아들에게 끊임없는 간섭과 회유,그리고 협박을 하는 나를 보고 그는 철이 들면 나아질 테니 기다리자고 했다. 또 살아보니 공부가 전부는 아니더라,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나는 현실은 보지 않고 자꾸 자율적인 의사만을 주장하는 그가 무책임하게 느껴졌고 이기적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행복하면 된다지만 그 행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내 철학에 굳은 신념을 가졌고 아이들의 진학과 결혼 등 응당 그가 신경써야 할 몫까지 나 혼자 기꺼이 짊어졌다. 동시에 내 걱정의 샘물은 마를 날이 없었고 편두통은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외출하는데 두 아이가 내 옆에는 오지 않고 그의 양팔에 매달려 좋아들 하지 않는가. 내가 설 자리가 없었다. 나는 행복해하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뭔가 몹시 억울한 마음이 마치 호수에 파문이 일듯 번져갔다.
그날 밤 나는 주님을 만나러 갔다. 하소연하는 나에게 주님은 이렇게 물으셨다. 아이들을 걱정할 때 나의 체면을 함께 걱정한 적은 없었는가. 진로를 결정할 때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며 강요한 적은 없었는가. 진실로 아이들을 믿어주고 또 그들을 보호하는 주님이란 존재를 믿는가. 그리고 또 주님은 한 권의 책까지 선물로 주시는 게 아닌가.
쓸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우연히 펼쳐 본 그 책, ‘예언자’에서 나는 작가의 말을 빌린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아이들에 대하여’란 단상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아이라고 그대의 아이는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열망하는 생명의 아들딸이다. 그대를 거쳐서 왔지만 그대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그대와 함께 있지만 그대의 소유물은 아니다. 그대는 아이들을 앞으로 쏘아 보내는 활이다. 사수이신 그 분(神)은 무한의 행로 위에 과녁을 겨누고,그 분의 화살이 빨리 그리고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그대를 당기는 것이다. 사수의 손으로 그대 구부림을 기뻐하라. 왜냐하면 날아가는 화살을 그 분이 사랑하심과 같이,그 분은 견고한 활 또한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활,아이들은 그 분이 사랑하는 화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무한한 것을… 내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애착과 소유욕을 버린다면 아이들은 내일의 집에 머무르는 고귀한 영혼을 가진 아이들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을… 레바논에서 태어나 20세기의 성자로 불렸던 칼릴 지브란은 그날 밤 허탈했던 나에게 다가 온 신의 대리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