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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박물관 | |||||||||||||||||||||||
60년대 학교에서 우유가루를 담았던 통 와그라니 | 2012.02.20 | 조회 14,870 | 추천 84 댓글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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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정량마을의 어느 농가에서 술통처럼 생긴 사진 속의 물체를 보고 집주인에게 '저것이 뭐래요'하고 물었더니 1960년 대에 학교에서 우유가루를 담았던 통이라고 한다. 40여 성상을 지나 풍요가 넘치는 21세기에 남겨진 지독히도 가난했던 시절의 증거물인 저 통이 이젠 사료통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면서 감상을 담아 보았다.
40여년 전 우유를 담았던 통 줄다리기 당산제로 유명하고 송월주 스님의 생가가 있는 산외 정량리 원정량마을에서 마치 술통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통 두 개를 발견하고 집주인에게 그 연유를 물어 보았다. 알고보니 그 통은 40여년 전 학교에서 우유를 담았던 통이라고 한다. 필자의 경우에는 1970년 초등학교 1학년때 미국의 원조물자인 우유를 처음 마셨다. 난로에서 뜨겁게 데워진 물을 가득담은 주전자가 난로 옆의 책상 위에 놓여지고, 우리들의 책상에는 컵이 하나씩 놓여졌다. 배급우유의 추억 이윽고 컵에는 우유가루가 담겨지고 뜨거운 물이 부어졌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우유 한잔 씩을 배급받아 마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풍경은 이듬해까지 이어졌으나 그 이듬해인 1972년에 5원짜리 둥근 빵이 나오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더는 무상급식이 아니고 유상급식으로 전환한 셈이다. 그 구수하고 때갈나는 빵을 하나는 먹고 하나는 싸들고 집으로 갈라치면, 우리들을 기다리는 산적이 하나 있었다. 우리들의 빵을 노리던 산적아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뒤에는 전봉준장군의 집과 단비가 서있다. 그 단비를 지나치고 이어서 전봉준장군의 아버지인 전창혁선생의 묘소가 나오는데, 그 묘소 오른편 언덕배기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던 몇살 위의 산적은 우리의 맛있는 빵을 노략질했고,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그 아까운 빵을 적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때로는 빨리 지나쳐 그놈을 피하는가 싶어도 '게섰거라'하는 산적의 외침이 들리면 우리는 가던 발길을 딱 멈춰야 했다. 게다가 그 나쁜 산적은 우리가 자그마한 소나무 아래에 살짝 감춰둔 빵도 용케 찾아냈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헌납을 해야 됐다. 지금도 그곳을 지나칠라면 그때가 떠오르는데 그 산적은 지금도 잘먹고 잘살고 있는지 사뭇 궁금하다. 코묻은 아우들의 빵을 산적질해 먹던 '천하에 조잡스런 산적아 전봉준장군에게 부끄럽지 않던?' #사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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