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댐 평화의 댐(1986.10-11)
(조선, 서울, 동아, 중앙, 한겨레 신문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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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30일 이규효 건설부장관은 '북괴'가 쌓으려는 "2백억톤의 물을 담은 거대한 금강산 댐이 무너질 경우...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완전히 황폐화하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재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기자회견을 벌였다.
이를 받은 언론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수공(물침략)'과 '물폭탄'에 대한 불안과 공포분위기를 확대하였다.
댐이 터지면 중부권일대가 물바다가 되어 서울의 63빌딩 허리까지 찰락찰락하게 되고 국회의사당 머리까지 꼴깍꼴깍 차게 된다는 것이다.
11월들어 교장선생이 학생들을 앞에놓고 손을 들어 구호를 외치고 선동을 해도 잡아가지 않고 오히려 보호해주는 데모, 통반별로 동원되어 금강산댐 추진하는 '북괴'를 규탄하는 관제데모가 수없이 열렸다.
대응댐으로 평화의 댐을 쌓자는 성금걷기 운동이 이어졌다.
봉급에서 본인들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성금을 원천징수 하였으며, TV 카메라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코흘리개 어린아이의 고사리 손으로 벙어리 저금통장까지 깨게했다.
그렇게 모금한 6백61억원의 성금은 어디에 쓰여졌을까,
그렇게 시작한 평화의 댐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토록 떠들석하던 분위기가 곧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다시 88년 여름들어 평화의 댐 문제가 언론과 국회를 통하여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설 시스템공학센터는 200억톤이 아니라 150억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금강산댐을 쌓으려해도 20톤짜리 트럭 1천대가 13년 동안 흙을 퍼 날라야 하며, 그렇게 쌓은 댐에 물이 다차는 기간은 14년이 걸린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모두 27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이 기간은 올림픽이 4년에 한번씩 치뤄지니까 6번 치르고도 3년이 남는 기간이다.
그런데 5공화국정권은 마치 2년뒤의 88올림픽을 치르지 못할 것처럼 요란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정부가 1986년 10월 30일 훨씬 이전인 봄부터 북한이 금강산 댐 건설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10월 30일에 발표를 했을까.
그 해 봄부터 직선제 개헌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 운동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28일에는 전국 26개대학의 학생들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을 가졌다.
5공화국정권으로서는 대학생들이 대립되는 가장 거추장스런 세력이었다.
경찰이 투입되어 빠져 나갈 구멍을 남기지 않고 밀어부치자 학생들은 모두 건물로 밀려들어갔다.
10월 29일 검찰은 학생들을 전원 연행 구속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겨레신문} 조차 없던 그 시절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건대사태'를 과장 왜곡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TV에서는 검붉고 푸르죽죽한 화면에 '광광광'하는 음산한 배경음악을 깔고 건대옥상에서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을 비춰댔다.
다음날, 금강산 댐 사건을 발표하였다.
많은 국민들이 불안속에서 '북괴는 물침략까지 준비하는데 철딱서니 없는 학생놈들이 무얼 안다고, 다 잡아들여!'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다음날 10월 31일, 헬기까지 동원한 상태에서 경찰 8500여명이 건대에 들어가 학생들 1500여명을 굴비엮듯이 연행하였다.
왜 금강산댐에 대해 발표한 10월 30일이 29일과 31일 사이였던가.
관제데모가 곳곳에서 벌어지던 11월에는 당시 재야 민주화운동의 구심체였던 '민통련'에 대한 해산명령이 떨어졌고, 민주화운동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주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종철군도 잡혀들어가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고문치사를 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사건은 그동안 숱하게 있었던 반공이데올로기의 선전.탄압과 같은 맥락의 사건이며, 민주화운동과 '애학투', '물침략'과 '물고문'은 무관하지 않으며, 다음해 급박하게 치달은 '4.13호헌 조치'와 6월항쟁도 내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댐 평화의 댐 사건을 1986년 10월이나 11월의 시점에서 정부가 발표한 내용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연관되는 다른 사건이나 전체의 시대상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는 시간의 긴 흐름 선상에서 어느 때인가, 전후 사정은 어떠한가, 다른 사건이나 인물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사회의 모순 그리고 사회의 모순구조에서 형성되는 대립되는 양대세력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역사적 과제 해결 방향에 합치하는가 역류하는가 등을 종합적.총체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한 평가를 우리는 역사적 평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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