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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박물관 | |||||||||||||||||
프로레슬링 1세대 ‘당수왕’ 천규덕 보물섬 | 2012.02.29 | 조회 19,039 | 추천 35 댓글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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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 1세대 ‘당수왕’ 천규덕
‘박치기 왕’ 김일, 백드롭 등 현란한 테크닉의 ‘비호’ 장영철, 맨손으로 황소를 때려잡는 ‘당수왕’ 천규덕. 1960~1970년대 프로레슬링은 지금 프로야구 이상의 국민 스포츠였고 이들이 황금기를 이끈 트로이카다. 김일과 장영철은 2006년 작고했고 이제 천규덕(78)씨만 생존해 있다. 지난 6일 오후 3시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종로체육관 내 4층 프로레슬링동우회 사무실에서 천씨를 만났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 프로레슬링은 ‘레슬링은 쇼’라는 장영철의 폭탄선언 한마디에 인기가 급전직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자장면이 500원 하던 시절 거액 입장료(3000원)에도 불구, 장충체육관은 입추의 여지없이 메워졌고 미처 들어오지 못한 관중이 몇 백 m씩 줄을 설 정도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높았다. 하지만 폭로사건 이후 한때는 10명도 보러 오지 않았다고 한다. 유일하게 생존한 당사자의 입을 통해 장씨의 폭로 이유와 사실 여부를 가장 먼저 듣고 싶었다. “그건 기자들이 그렇게 쓴 거야. 1970년인가 일본 레슬러들을 초청해 장충체육관에서 게임을 했는데 내가 첫날 오쿠마라는 선수를 상대로 해 고전 끝에 이겼지. 워낙 힘이 좋은 선수여서 다음날 경기를 갖는 장영철에게 ‘힘이 좋으니 보통 기술로는 안 된다’고 조언했어. 그런데 장영철이 그만 상대의 ‘보스턴크랩(일명 새우꺾기)’에 걸렸어. 패배 일보 직전에 몰리자 장영철은 링사이드의 후배들에게 ‘다들 들어와’라고 외쳤고 오쿠마를 집단 폭행했어. 당시 관중들은 일본 선수들을 불러 ‘작살’내는 것을 보는 재미로 왔는데, 이 때문에 장영철이 일본 선수에게 지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해 그런 사건을 일으킨 게 아닐까 생각해. 중부경찰서 경호경관들이 총출동해 레슬러들을 연행해 갔는데 신문기자들이 몰려왔지. 기자들이 ‘항간에 레슬링은 쇼라는 소문이 있는데 진짜인가?’라고 물었어. 완강히 부인했으면 되는데 장영철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기자들이 (시인하는 것인지 알고) 그렇게 써버렸지.” 아무 근거도 없이 그런 소문이 돌았을까. “그건 일반인들이 레슬링 룰을 몰라서 그랬을 거야. 레슬링은 상대가 기술을 걸면 받아주어야 하고 급소 공격은 금지돼 있어. 로프를 잡으면 놓아주어야 하고, 이런 룰들을 일반인들이 몰라 그런 말이 나온 것이지, 당시는 맹세코 각본이 있진 않았어.” 부산 서대신동에서 3남매의 막내로 출생한 천씨는 자주 놀러가던 동네 저수지 둑에서 이상한 동작으로 운동하는 중년의 신사를 만난다. 중국에서 당수를 수련하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이철산이었다. 제자가 되길 청해 중1 때부터 당수를 배운 천씨는 3년 만에 초단을 받았다. 6년제인 대신중 4년 때(1949년) 중퇴하고 ‘비행기를 타보고 싶어’ 육군항공대에 자원입대했다. 직접 교전은 하지 못했지만 6·25전쟁에도 참전했다. 휴전 후 여의도에 배치돼 황기 사범이 운영하던 무덕관에서 운동을 하며 3단(최종적으로는 공인 6단)을 땄다. 프로레슬링과의 인연은 29세이던 1961년 부산에서 맺었다. 부산으로 전출간 그는 퇴근 후 남항동의 ‘종합체육관’에서 태권도 사범을 했는데 여기서 레슬링 사범 장영철을 만났다. 그런데 장영철이 한국에서 가장 먼저 프로레슬링을 시작한 연유가 재미있다. “프로레슬링을 소재로 한 불란서 영화 ‘야수라는 이름의 사나이’를 보고 감명을 받아 영화에 나오는 기술을 혼자 익혔다고 해. 어느 날 장영철과 남포동 밤길을 걷는데 전파상 앞에 사람이 잔뜩 모여 있어. 뭔가 가보니 일본 방송에 역도산이 나와. 그가 미국 선수들을 가라테로 쓰러뜨리면 일본 관중들이 환장하더구먼. 패전국 국민들이 레슬링을 통해 울분을 푸는 것이었지. 그걸 보고 나도 장영철에게 레슬링을 해보고 싶다고 해서 입문하게 됐어. 둘이 부산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열었는데 반응이 좋아 ‘서울로 올라가자’고 의기투합했지. 서울운동장 정구장에서의 첫 경기는 포스터 몇 장 붙였을 뿐인데 경기장이 인산인해야. 1년에 1∼2번 휴가를 얻어 상경해 게임을 하곤 했지. 1964년 동양방송이 개국했는데 김재길(전 서울올림픽방송본부 제작국장) PD가 개국기념으로 레슬링 TV중계를 한 것이 본격적으로 인기몰이를 한 계기가 됐지.” 거구의 일본 선수들을 때려눕히는 것을 구경하러 장충체육관에 프로레슬링 관중이 몰려들자 박정희 정권은 적극 후원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협회장을 맡고 비원 안에 연습장을 마련해 주었다. 1963년 준공된 장충체육관이 프로레슬링의 메카가 된 것도 정책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일본 선수들과 한 달에 한 번은 경기를 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역도산 때문에 레슬링을 하게 된 천씨는 그를 롤 모델로 삼고 흠모했다. 그는 경기 중 항상 검정 타이츠를 입었는데 이 역시 역도산을 따라한 것이다. 역도산을 따라 일본으로 갈 뻔도 했다. 1963년 역도산이 레슬링 전용경기장을 장충공원에 짓겠다며 방한했는데 다른 레슬러들과 조선호텔에 도열, 인사를 드렸다. “나는 그때 육군 정복을 입고 나가 역도산과 악수를 했는데 격파를 많이 해 손이 나처럼 투박하더군. 역도산도 그걸 느꼈는지 수행원에게 ‘군복 입은 선수를 일본으로 데려 갈 테니 준비시키라’고 했어. 제대신청을 하고 여권 준비에 들어갔는데 그만 역도산이 절명해 없던 일이 되고 말았지.” 천씨는 당수로 황소를 3마리나 때려잡은 적도 있었다. “‘장영철 사건’을 만회하기 위해 뭔가 이벤트가 필요했어. 마장동 도축장을 찾아가 부탁하자 흔쾌히 소를 내주더군. 두 방 때리니까 죽어. 며칠 후 다시 연습했는데 역시 두 번 치자 쓰러졌어. 자신이 붙어 ‘황소를 맨손으로 때려 죽인다’고 TV광고까지 했어. 그런데 중앙정보부 감찰부장이 남산으로 들어오라고 전화를 했어. 주눅이 들어 갔더니 ‘천 선수, 공화당 상징이 황소인데 그걸 때려죽이겠다는 게야? 정부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며 중지하라고 하더군. 광고까지 나갔다고 사정했더니 ‘그러면 한두 방에 끝내지 말고 여러 번 때려 황소가 그렇게 세다는 것을 보여준 후 죽이라’고 하데. 결국 15번이나 쳐서 죽였어.” 천씨는 레슬링의 인기회복을 위해 한 번도 없었던 김일-장영철-천규덕의 맞대결도 제의했다. “내가 먼저 장영철과 맞붙고 이긴 사람이 김일과 대결하기로 했어. 장영철이 내 당수에 눈을 맞아 피를 흘렸지만 평소 자신의 기술이 최고라고 자랑하는 장영철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내가 졌지. 그런데 다음날 김일과 싸워야 할 장영철이 경기를 안 하겠다고 해. 막무가내였어.” 김일과 장영철을 화해시키려 노력했던 천씨는 장영철을 미국에 원정보내기로 준비를 했지만 장영철은 이마저 거부하고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협회를 떠났다. 김일은 천씨에게 대신 미국에 가라고 권했다. “1972년 미국 테네시에 가니 프로모터가 ‘여기는 흥행이 중요하니 특기가 있어야 한다. 당신 특기는 뭐냐’고 묻더군. 그래서 커다란 돌 몇 개를 준비하라고 했지. 경기에 앞서 당수로 수박만 한 돌을 격파했더니 관중들의 호응이 대단했어. 다음날 곧바로 테네시주 태그매치 챔피언과 게임을 주선해 주더군. 파트너는 일본교포 ‘BY 장’이었는데 바로 챔피언을 땄지.” 그러나 미국 프로모터와의 1년 계약은 두 달 만에 끝나고 만다. “경기를 앞두고 ‘게다’와 일본 전통 옷을 입으라는 거야. ‘나는 코리안이다. 일본 옷을 입고 출전하지 않겠다’고 했어. 테네시는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많은 흑인 전사자가 나온 곳이었어. 그래서 내게 일본 옷을 입히고는 때려눕혀지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지. 물론 애국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겁도 많이 나서 곧바로 보따리를 싸 돌아왔어.” 천씨는 역도산 때문에 14년간 근무하던 군에서 제대했고 곧바로 영진약품에 입사해 무역부장까지 지내다 1987년 정년퇴직했다. 레슬러가 무역부장까지? 얼굴마담이 아니었을까. “근무 제대로 했어. 제대하기 전에 영진약품 부산지사장이 입사를 권유하러 왔어. 속으로 ‘구론산’ 선전모델이 아닐까 생각하긴 했었지. 창업주이신 고 김생기 회장이 ‘123번’이라고 각인된 회사 배지를 달아주면서 열심히 하라고 하시데. 입사 15년 만에 무역부장이 됐지. 회장님은 ‘천 선수, 김일보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를 한국 레슬링의 보스로 남겨두라’고 당부하시는 등 레슬링에 애정이 많으셨어.” 당대의 스포츠 스타였던 천씨는 연간 15~20회 출전했다. 꽤 돈도 벌었을 것 같은데…. “돈 얘기는 묻지 마. 창피하니까. 한 달에 그때 돈으로 직장인 봉급 정도인 20만∼30만원 받았어. 복싱은 혼자 가져가지만 우리는 선수도 많고 사무실 직원까지 있었으니까 그 정도밖에 돌아오지 않았지. 김일은 프로모터라 월 200만∼300만원은 가져갔어. 큰돈이었지만 일본 출장도 자주 다녀야 하는 등 사실 돈 나갈 데도 많았지. 나는 회사에서 그만큼 월급을 받아 그래도 형편이 나았어. 애들 공부시키고 이만큼 살았으니 불만은 없어.” 탤런트 천호진이 큰아들, 둘째 아들(소진)은 제17회 한국건축대상을 받은 유명 건축가다. 요즘도 하루 5시간은 운동한단다. “아침에 (약간 높은 곳을 짚고 하는) 팔굽혀펴기를 2000번 해서 몸을 풀고 오전, 오후로 20㎏짜리 아령 운동을 해. 움직이지 않으면 녹스는 것이 세상 이치야.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열심히 단련해야지.” 천씨는 인생 후배들에게 “한 가지를 시작했으면 끝장을 보라”고 조언한다. “돈도 벌지 못하는 힘든 운동을 했지만 운동을 통해 도(道)를 배웠기 때문에 내 인생이 빗나가지 않았어. 고향 친구 중 하나가 나중에 조폭 두목이 됐는데 학창시절 나에게 함께하자고 하더군.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그 길로 나갔을지도 모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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