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매도가 거기 있다. 유년기의 추억처럼 그리움이 진저리칠 정도로 피어나면 파돗소리 위에 꿈처럼 떠있는 섬. 옷을 벗고 뛰어 들면 물고기 그림자가 가슴속에 새겨지고, 소나무 푸른 바람소리에 누워 물결 위를 떠다니며 구석구석을 노래하고픈 섬이 남쪽 나라에 있다. 관매도는 전남 진도군 조도면 조도6군도에 속한 섬으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진도 팽목에서 약 1시간 10분 정도 배를 타고 푸른 바다를 헤치고 남진하면 고운 모래톱이 펼쳐진 섬, 관매도다. 관매도는 진도군이 자랑하는 섬으로 관매8경 가운데 바닷물이 맑은 관매해수욕장이 일품이다. 고운 모래사장이 약 1.5킬로미터에 이르고 매우 완만하여 가족끼리 갈 수 있는 대표적 해수욕장이다.
또한 관호마을 뒷길을 넘어가면 거대한 ‘꽁돌’이 나오는데 그 앞 바닷물은 맑아 스킨 스쿠버를 하기에 제격이다. 관매해수욕장 북쪽 끝에는 해안 절벽지대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굴앞바위’라 부르는데, 200여미터 펼쳐진 수직벽과 오버행은 수평 홀드와 스탠스가 전반적으로 양호하며, 등반 높이도 다양한 편이다. 아직 미개척지이지만 클라이머의 손길이 닿는다면 해벽천국이 될 수 있는 곳이다.
관매도에 가기 위해 새벽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6월 5일 새벽 5시 30분, 관매도 해벽등반팀이 서울 클라이밍센터에 모였다. 기자와 황규필사진기자, 그리고 서울 클라이밍센터 대표인 안강영씨(36세)와 이곳의 회원인 최인권씨(28세·하나산악회), 김주형씨(28세·설거미산악회), 권영세씨(28세·시발클럽)와 홍일점인 박경희씨(27세·산골산악회)는 진도를 향해 달렸다. 진도군 팽목에 도착했다.
관매도와 진도를 잇는 정기운항선 대양고속훼리호에 올랐다. 배는 남해의 푸른 물살을 가르며 수석같이 떠있는, 다도해가 꿈꾸는 물빛 고운 남쪽 나라로 향한다.
머나먼 수평선 위에 관매도가 보이고.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이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 귀를 찢기고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은 없었다”는 이생진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시구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기자는 관매도 그 바다 앞에 취하고 말았다.
관매도에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굴앞바위로 갔다. 해벽을 바라보던 일행은 절대고독을 본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검은 기왓장을 포개 놓은 것 같은 해벽. 약 45미터의 높이의 직벽과 거대한 오버행이 우리를 무참히 주눅들게 만들었다.
절벽과 바다의 절경, 하늘다리
지도상에 표시된 해안 절벽으로 가기 위해 관호마을 뒤로 넘어가기 전에 박영일씨(30세)를 만나 관매도의 여러 지형지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의 말대로 관매8경의 하나이면서 거대한 절벽인 ‘하늘다리’를 정찰하기로 했다. 관호마을 돌담장길 골목을 지나 밭이 있는 둔덕을 넘어서자 곧 맑고도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우측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왕돌끼미’ 해안에 도착하니 거대한 꽁돌이 보이고, 해안선을 따라 암반이 펼쳐지고 작은 모래사장이 나왔다. 모래사장이 끝나면서 작은 풀밭 위로 산길이 나타났다. 길은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아서인지 조금 억센 편이지만 하늘다리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관호마을에서 약 1시간을 걸었더니 길이 끊기고 말았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까마득한 두 개의 벽면이 약 2.5미터 정도 마주 보고 있는 하늘다리 사이로 연청색 바닷물이 출렁대고 있었다. 등반장비를 가져오지 않아 하늘다리를 위에서만 관찰한 결과 등반성이 있어 보여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관호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관매해수욕장 뒤편의 솔밭을 야영지로 정했다.
해가 떠오르고 비릿한 바다 내음이 배어 있는 하늘다리로 등반하러 떠났다. 하늘다리에 도착해 두 개의 큰 소나무에 자일을 묶은 다음 최의권씨와 안강영씨가 절벽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하강했다. 바위 상태를 살피러 내려갔던 최씨와 안씨가 올라오더니 하늘다리의 높이는 약 75미터 정도이며, 아래 부분은 오버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낙석 위험이 있어 현재로는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그러나 긴 시간에 걸쳐 바위를 청소하고 개척한다면 가능성은 많다고 한다. 하지만 하늘다리 상단은 등반이 가능해 보여 상단 일부 구간만 톱로핑으로 등반하기로 했다. 최의권씨가 먼저 10여미터 하강해 등반을 시도했다. 하늘다리는 워낙 바람이 심한 곳이라 최씨의 머리칼이 사정없이 흩날렸다. 그 바람 속에서도 최씨는 의연한 듯 등반을 계속했다.
그러나 전혀 등반하지 않던 곳이라 최씨가 잡은 홀드들은 간혹 종잇장처럼 갈라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최씨의 표정이 흔들렸지만 개의치 않고 올라왔다. 김주형씨가 내려가 등반을 시도했다. 김씨 발 아래는 까마득한 절벽. 그 절벽으로 푸른 물결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치밀어 올라 그를 휘감을 듯했지만 하얀 절망 같은 고도감과 싸우며 올라온다.
가끔 떨어지는 낙석들이 비좁은 공간으로 떨어지다가 굉음을 흘리며 바닷물에 처박힌다. 하늘다리 등반을 마치고 관매해수욕장 끝에 있는 굴앞바위로 갔다. 이 해벽에는 깊지는 않지만 거대한 오버행처럼 생긴 해식동굴이 두 개 있다. 처음 것은 규모가 작고 두 번째 것은 45미터가 넘는 거대한 오버행이다. 그 가운데 두 번째 굴의 바깥 오버행을 등반하기로 했다. 톱로핑을 위해 권영세씨가 굴 우측 벽을 등반하며 올라간다. 그는 등반도중 두 개의 하켄과 하나의 프렌드를 설치하며 절벽을 지나 소나무에 확보했다.
절망의 노래 부르는 오버행
그 후 최인권씨가 확보물을 회수하며 올라갔고, 그들은 가시덤불과 싸우며 오랜 시간에 걸쳐 톱로핑을 위한 준비를 했다. 먼저 김주형씨가 등반을 시도했다. 이 오버행은 밑에서 보기에 홀드와 스탠스가 많아 등반이 쉬울 것 같았지만 올라갈수록 불량한 홀드와 바위 면에 약간의 물기가 있어 등반은 쉽지 않은 듯했다.
김씨가 고전하며 여러 등반 동작을 취하며 올라갔다. 김씨는 10미터쯤 등반하고 내려왔다. 머리를 빡빡 깎은 박영세씨가 가냘픈 몸을 이끌고 등반을 시도한다. 그는 마른 몸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아주 침착하게 홀드와 스탠스, 오버행의 좌우측 벽을 이용해 그에게 주어진 하나 하나의 과제를 해결하며 올라갔다. 청소가 안된 곳이라 갈라져 있던 편마암이 떨어져 가끔 낙석이 발생했지만 그의 몸짓은 한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의 연결이 부드러워 보였다.
그런 그도 15미터쯤 나아가더니 무척 힘이 드는 모양인지 힘쓰는 소리가 아래까지 들렸다. 그는 안강영씨에게 “형, 이 위로는 홀드가 없어 등반이 힘들 것 같아” 하면서도 여러 동작을 더 취해 본다. 그러나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하강했다. 권영세씨에 의하면 이 오버행은 5.11d 수준이 될 거라고 말했다. 저녁 해가 서서히 떨어질 즈음 벽 위에서 황기자의 빌레이를 보던 최의권씨가 하강했다.
수영과 해벽의 즐거움, 굴앞바위
다음 날 아침 굴앞바위로 등반하러 갔으나 물때가 맞지 않아 오늘 목표로 한 해벽으로 갈 수 없었다. 관매도리 선착장에 가서 2만원을 내고 배를 탔다. 굴앞바위 끝머리에 내려 등반준비를 했다. 최의권씨가 5.9급의 직벽을 올라 등반준비를 할 즈음, “어머, 돌 틈에 게가 많네요” 하며 박경희씨가 소리친다. 기자와 박경희씨는 물이 빠져나간 바위틈의 게들을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사이 황규필기자는 “여기까지 와서 수영 못하고 가면 후회할 것 같다”며 6월의 찬란한 바닷물로 풍덩 뛰어든다. 굴앞바위 끝머리의 바위는 약 15미터 높이의 두꺼운 편마암으로 이루어졌으며, 암질은 더없이 단단한 편이다. 이곳은 주로 150도의 오버행으로 이루어진 벽이지만 홀드와 스탠스가 양호해 등반은 수월해 보였다.
톱로핑 준비가 끝나고 최의권씨가 아주 유연하면서도 섬세하게 오버행 첫마디의 단추를 끼우기 시작한다. 그가 홀드를 잡고 힘을 줄 때는 그의 팔 근육들은 최고의 긴장감을 가진 활시위 같이 팽팽하다. 그는 거침없이 오르다가 점점 높아지는 고도감 위에서도 한치 빈틈없는 자세를 선보인다. 이 팀의 막내인 박경희씨가 노란 꽃무늬 수영복을 입고 등장한다.
뭇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그녀는 5.10급 오버행을 마음을 비운 듯 차분히 오르기 시작한다. 날개 깃털처럼 가볍게, 바람의 움직임보다 빠르게 하얀 초크가루를 날리며 고빗사위를 넘는다. 박경희씨가 등반하는 도중 클라이밍센터 선배들은 수영을 즐기면서도, 그녀가 어떻게 등반하는지 궁금해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바라보곤 했다. 박경희씨의 등반이 끝나자 바로 옆의 오버행으로 등반지를 바꿨다. 오랜 등반 경험이 있는 서울클라이밍센터 대표인 안강영씨는 리딩으로 5.10d급의 오버행을 돌파하는데, 조심스러우면서도 유려한 등반 솜씨를 후배들에게 선보인다.
그때 배를 타고 유람하던 사내들이 박수치며 제비 같은 사투리로 감탄사를 던졌다. “워매, 멋져. 멋져부러!” 오후 두 시가 넘어서야 해벽 등반을 마칠 수 있었다. 오후 4시에 출발하는 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뒷마무리를 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굴앞바위 바로 밑까지 차 있던 바닷물은 오후 2시가 넘어서 완전히 빠져 일행은 굴앞바위를 걸어 야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둘러 라면으로 점심을 때운 후, 아쉬운 듯 관매도를 마음속에 남겨 놓고 뭍이 그리운 진도로 향했다. <글·김기섭 기자 사진·황규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