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대응 따위는 나 몰라라 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상을 깨고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 깜짝 참석했다. 스웨덴의 16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등이 촉발한 세계 곳곳의 기후변화 대응 목소리가 트럼프를 결국 회의장으로 불러낸 것이다.
이날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후행동 정상회의에는 각국 정상들과 정부 대표, 기업과 시민사회 대표단, 국제기구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는 2021년 파리 기후변화협정 시행을 앞두고 각국과 민간부문이 행동계획을 발표하고 공유하는 자리였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해수면 상승과 기상이변들을 쭉 거론하면서 “전 세계에서 분노한 자연이 반격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빨리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삶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며 “지금은 협상을 할 때가 아니라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해 행동할 때”라고 강조했다. ‘탄소중립’은 인류가 내뿜는 탄소의 양이 지구 순환계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돼 더 이상 기온이 올라가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말한다. 한마디로 배출하는 만큼 상쇄해 총 배출량을 0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영상메시지를 보내 “문명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면서 “지구가 고통받고 있지만 기회의 창은 여전히 열려 있다”며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날 행사에서 단연 눈에 띈 인물은 ‘지구를 위한 10대들의 대변인’으로 떠오른 툰베리였다. 그는 세계 정상들을 향해 “미래 세대의 눈이 여러분들을 향하고 있다”며 “여러분이 우리를 저버린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20일 지구촌 곳곳에서는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으며, 특히 그레타에게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들이 대거 목소리를 냈다.
이날 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은 파리 협정에 맞춘 온실가스 감축계획을 발표했다. 미국, 중국과 함께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2022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55% 줄이고, 2050년에는 ‘기후 중립’을 이루려 한다”고 말했다. 독일은 2030년까지 전체 에너지 수요의 3분의 2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할 계획이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에서 2020년 핵발전을 마감하고, 2038년까지는 석탄 발전도 단계적으로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은 미국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왕이 외교부장은 “각국이 협정을 존중하고 이행해야 한다”면서 “몇몇 나라들이 탈퇴한다 해도 세계 공동체의 의지를 흔들거나 국제협력의 역사적인 흐름을 되돌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 공화당의 반대 속에도 힘들게 파리협정에 가입한 미국이 트럼프 정부 들어 탈퇴를 선언하고 합의를 뒤집은 것을 비난한 것이다.
하지만 미래 세대의 거센 요구에 비해 정상들이 내놓은 계획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분석이 많다. 중국과 인도는 온실가스를 줄일 구체적이고 신속한 행동계획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약속’이 없었다. 트럼프는 이번 회의 전날까지도 “나에게는 홍수도 중요하고 기후변화도 중요하고 모든 게 중요하다”면서 기후변화 회의에 참석하기보다는 텍사스와 오하이오의 홍수 현장을 찾아갈 것이라고 했었다.
여론에 밀려 이날 오전 행사장에 나온 트럼프는 모디와 메르켈의 연설을 들은 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미국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비난이 예상되자 유엔 회의장에 등장했지만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14분만에 떠났다”고 보도했다. 연단에 오른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트럼프를 향해 “우리의 논의가 당신의 기후정책에 유용하게 쓰이길 바란다”고 비꼬아 박수를 받았다.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 195개 협약국은 2015년 ‘교토 의정서’의 후속 대응체제를 담은 파리 기후변화협정을 채택했다. 핵심은 이번 세기 말까지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2도 넘게 오르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기후변화에 극심한 영향을 받는 저개발국가들과 환경단체, 전문가들의 요구로 ‘1.5도 상승선을 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조항이 추가로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