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개성에서 태어난 원병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학자였던 아버지 원홍구 박사와 함께 여섯 살 때부터 새 공부를 시작해서 평생을 새 연구에 바친 조류학자였다. 1956년부터 농림부 임업 시험장에서 일하며 새를 연구했는데, 전쟁 뒤라 모든 것이 부족해 임업 시험장에는 책 한 권도 없었다. 혼자서 표본을 만들고, 연구하고, 헌 책방을 찾아다니며 월급을 몽땅 털어서 책을 구했다.
그의 연구는 번번이 벽에 부딪쳤다. 하지만 물어볼 사람도 물어볼 곳도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일본 학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당시엔 우리나라 사람이 쓴 야생 동물에 대한 책은 없었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이 쓴 책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원병오는 그 책에서 본 학자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었다.
“저는 한국에 있는 새의 종류를 분류하고 생태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책도 거의 없을 뿐더러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가능하면 좋은 책도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서 이렇게 써 내려갔다. 그는 유명한 학자도 아니었고 더구나 식민지였던 한국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편지를 보낸 뒤 놀랍게도 답장이 오기 시작했다. 일본 학자들은 자신들이 쓴 논문과 비싼 책들을 부쳐 주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었다. 얼굴이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다른 일본 학자들도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
“어렵더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힘이 닿는 대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연구란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무조건 열심히 채집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학문에 대한 연구는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는 것임을 그는 알았다. 그렇게 일본 학자들의 도움으로 큰 힘을 얻은 그는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조류학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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