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국방의 요충지며 병자호란 때 인조대왕이 피신해 마흔 닷 세 동안 청나라 군사와 대항하다가 마침내 삼전도에 나가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고 해서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으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 따르면 청나라 군사가 이곳을 공격했으나 칼도 써보지 못했고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던 곳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말고도 또 다른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839년과 1866년 사이에 350명이 넘는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받고 죽음을 당한 곳이 이 성의 동문 언저리에 있던 형터였다. 이곳은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순교성지인 신용산에 있는 새남터와 마포에 있는 절두산 성지 그리고 퇴촌면 우산리에 있는 천진암과 더불어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순교성지로 꼽히고 있다.
발굴된 1950년대 남한산성 안내 팸플릿을 살펴보면 관광객들을 위해 국립공원 남한산성 관광기념품 판매부에서 제작한 것으로 당시 남한산성 관광 상식보급을 위한 현상문제가 나와 있다.
현상문제를 살펴보면 ‘첫째, 국립공원 남한산성 소재지는 어디인가?’, ‘둘째, 수어장대의 역사?’, ‘셋째, 남한산성을 본 소감?’, ‘넷째, 남한산성은 서울서 이정은 얼마나 되나?’ 등으로 현상공모에 따른 상품으로는 ‘1등 남한산성 수탐푸입 우산 1개(3명)’, ‘2등 남한산성 그림엽서 1조(5명)’, ‘3등 남한산성 화입수건 1개(10명)’로 기록돼 있다. 당시 남한산성을 찾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관광엽서 등이 발매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안내도에는 수어장대를 비롯해 숭열전과 남문 등의 사진도 싣고 있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수어장대의 크기는 1층 면적 105.08㎡, 2층 면적 43.29㎡로 1624년 남한산성을 축조할 당시 세운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수어청의 장군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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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당시 남한산성 수어장대를 찾은 관광객들이 찍은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