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8월의 대홍수-1]
벌서 38년 전의 사건이 되어버린 전국적인 집중호우로 심각한 수해로 인해 사망과 실종에 529명의 인명피해가 났고, 災民 36萬, 財産피해 52억의 피해가 난 것은 보통 수해가 아니였습니다.(한국일보 1972년 8월 22일자 기사 인용. 최종 집계는 이날 이후에...)
◎ 1972년에 8월 19일 남한강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려 사상 초유의 극심한 피해를 안겨 주었다.
1972년 8월에 접어들자 양자강 유역에서 접근한 저기압과 태풍 14호 베티(BETTY)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예년에 비해(제주도 제외) 39.5~657.6㎜가 많은 114.0~881.8㎜의 비가 내렸다.
서울, 중부지방 및 강원도 일원에 17일 부터 내리기 시작한 폭우는 집중호우로 변하여 서울과 수원 지방에 사상 최대의 강우량을 보였다. 20일까지의 2일 연강우량은 서울이 452.4mm(이는 1907년 서울측후소 개설 이후2일간 최대강우), 수원이 461.8mm을 기록했다.
◎ 남한강 상류지역에 있는 충북 단양 지역에서는 8월 17일 217mm, 8월 18일 98mm, 8월 19일32mm, 8월 20일 87mm 등 나흘간 무려 434mm의 폭우가 쏟아졌고 8월 17일과 8월 18에 집중 되었다. 거기에다가 더 상류지역인 강원 영월지방에 내린 폭우까지 가세되어 유입되는 물의 양이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가장 수해가 격심했던 단양, 제천지역은 남한강 상류의 범람으로 10개 마을이 침수되어 수천여명 이재민이 9일간 고립된 채 수마와 싸웠으며, 정부에서는 15일분의 긴급식량을 공수하기도 했다.
◎ 8월 17일 부터 내린 집중호우로 8월 19일 오후부터 8월 20일 10시까지 단양 시가지가 20시간 동안 물에 잠겼다. 단양이 지척인 하류쪽의 청풍, 수산, 한수, 살미지역도 몇 시간차를 두고 일시에 많은 물이 유입되어 천지개벽에 가까운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 손을 써볼 여유도 없이 급속하게 불어난 강물에 순식간에 집들이 물에 잠기기 시작하였고 여기저기에서 기와집 무너지는 소리도 들렸다. 초가집들이 한 채, 두 채 떠내려가기 시작하였고 애써 기르던 돼지, 소, 닭들도 떠내려 갔으며, 집지킴이라는 팔뚝 굵기의 커다란 흑 구렁이도 떠내려갔다.
◎ 졸지에 당한 수재인지라 살림도구도 제대로 못 챙기고 피신하기에도 급급할 정도였으니 농작물은 신경 쓸 경황이 없어 물에 잠기는 모습을 그냥 안타깝게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 비가 구질구질하게 내리는 가운데 급속하게 불어나는 강물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급히 귀중품과 전답문서, 옷가지 몇 점만 챙겨서 높은 지대로 몸뚱이 하나 피신하기에 급급하였다. 일부 어르신들은 병자년 대홍수 때에도 집이 떠내려가지 않았다며, 피신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다가 간신히 지붕위로 올라가 있다 배편으로 구조 되기도..
※ 병자년 대홍수 : 1936년에 발생한 수해로 경남과 강원도의 피해가 심했는데 강원도에서만 961명이 목숨을 잃었다. 8월 10~14일의 집중호우가 원인이었다. 이해의 홍수로 사망자는 1,916명에 이르렀다. 농경지의 침수면적이 38,835ha에 달했다. (어른들의 고증에 의하면 병자년 대홍수 이후의 큰 물난리 라고 들었다)
◎ 다행히도 한 낮에 물이 불기 시작하여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 만약에 한 밤중에 그 물난리가 났다면 수많은 인명피해를 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대피하고 난 이후인 밤에도 계속 물이 불어 수십 년 전, 병자년에 발생했던 대홍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물난리로 인하여 침수 피해를 입지 않은, 비교적 고지대의 집에서는 졸지에 여러 가족 수십 명이 한집에서 기거하며 숙식을 같이 하게 되었다. 침수지역의 대부분의 주민들은 모두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 이 기간 동안 전국적 피해는 총 피해액 26,478백만 원, 침수면적 90,528ha(1ha=10,000㎡,), 건물 76,545동, 선박 35척, 농경지 유실ㆍ매몰 13,304ha 하천 4,195개소, 수리시설 1,118개소 등이었다. 한편 1972년의 총 홍수피해상황과 8월 18~20일간의 피해를 보면서 보면 연간 사망자 총수 852명의64.5%인 550명, 이재민 총수의 89.4%인 586,696명, 그리고 총 피해액은 77.6%인 26,478백만으로 나타났다.
◎ 홍수로 강줄기가 바뀌고 물 깊이가 바뀌고 모래와 자갈이 유실되는 변화가 생겼고 폐허로 변한 마을을 복구하는 대신 다시는 수해를 입지 않을 고지대 여기저기에 새마을 부락을 지어서 이주하니 지도마저 바뀌게 되었다. 그 홍수는 마치 수몰에 대한 예행연습이었던 것처럼 13년이 흐른 1985년에 충주댐이 완공되어 홍수 때보다 수 백 배 많은 물이 가두어져 단양, 청풍, 수산, 한수, 살미 대부분이 수몰 되었다.
◎ 홍수피해는 단양, 수산, 청풍, 한수 등 남한강 상류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주지역에서도 시가지가 물에 잠기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며 서울의 용산지역도 물에 잠기는 피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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