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앨범을 들춰봅니다. 옛 사진들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그런데도 사진 속 친구들은 가물가물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 그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곧 직장을 다녀야 했고 시집이라도 가게 되면 먼 도시로 도리 없이 떠나게 되었으니 연락도 끊어지고 소식도 들을 길이 없고. 그러다 세월 가면 잊히게 마련이지요.
그래도 고교시절을 생각하면 늘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1년에 한번, 여름에 열리는 축제인데요. 학교 행사 중에 가장 큰 행사였어요. 축제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했는데, 오전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모두 축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줄 만큼 학교에서도, 선생님들도 중요하게 여겼던 대행사였죠.
고향인 부산에서 다니던 그 학교는 특수목적고등학교는 아니지만 전통문화와 예술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소중함을 항상 강조하던 학교였습니다. 전교생이 졸업하기 전에 가야금을 다 연주해볼 정도였답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를 민속학교라고도 했죠.
그런 만큼 학교 축제에 가장 중심이 되었던 행사는 바로 학생 전체가 반별로 세계 여러 나라의 민속춤을 선보이는 거였어요. 인도의 바라춤이며 부채춤 같은 것들을 정해 학급 별로 나와 전교생과 부모님, 친척,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거죠. 우리 학년에만 열 두 개 반이 있었을 때였으니, 모든 학급이 민속춤을 추면 서른 가지가 넘는 춤을 볼 수 있는, 말 그대로 민속춤잔치였답니다.
그 공연은 동시에 의상 페스티벌이기도 했어요. 누구나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요즘 학예회나 운동회에서처럼 똑같은 옷을 사 입지도 못했지요. 대신 플레어 스커트였던 교복치마를 이용해서 춤에 어울리는 민속의상을 직접 만들어 입었답니다. 색종이나 습자지, 휴지, 박스 같은 것들을 교복치마에 오려붙이고 꿰매어서 무대의상을 만드는 거죠.
그러니 만드는 사람마다 다른 옷들이 만들어졌어요. 그래도 그 때에는 다들 솜씨가 있어서 만들어놓고 보면 꽤 훌륭하게 보였어요. 그 축제에서 우리 반이 췄던 춤은 일명 캉캉춤이었습니다. 그래서 캉캉치마를 만들어 입었는데, 재료는 다름 아닌 휴지였답니다.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서 주름을 잡아 일일이 손으로 박음질해서 만들었어요. 재료 구하기 쉽고 만들기도 쉽고 재활용도 되니까요. 공연이 끝나면 치마에 붙었던 휴지를 떼어서 땀을 닦곤 했답니다.
이 사진은 17살, 81년 고1때 축제에서 엄마, 옆 반 친구와 찍은 사진인데요. 오른쪽에 있는 아이가 바로 저랍니다. 휴지로 만든 캉캉치마 보이세요? 조금 뜯겨 있는 부분이 바로 공연이 끝난 다음에 흐르는 땀을 닦느라 휴지를 뜯어낸 자리랍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재미있는 추억이에요. 잊혀지지 않을 축제, 그리고 잊히 않을 치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