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만에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사람들은 해방감을 만끽했다.
1982년 1월5일 밤 12시. 야간 통행금지가 시작된 지 36년 만에 전방 접경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서울 한복판, 서대문 로터리를 가로막았던 육중한 바리케이드도 치워졌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해방감을 마음껏 즐기기 시작했다.
올 나이트와 ‘고고족’
통행금지가 있었던 당시에는 밤 11시 30분이 넘으면 모두들 황급히 길을 재촉했다. 길에서는 마지막 시내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어쩌다가 통금시간을 어기면 경찰이나 방범대원에게 붙잡혀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술집에서 자정을 넘기면 통행금지가 풀릴 때까지 술을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통금 속에서도 술집은 성업이었다. 댄스홀이 고고장과 디스코테크로, 비어홀이 룸살롱으로 모습을 바꾸었지만 통금 속에서도 꿋꿋이 영업을 했다. 당시 학생들과 청년들은 ‘올나이트했다’는 말을 하곤 했다. 밤새 고고춤을 추며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을 ‘고고족’이라고 불렀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31일이었다. 사람들은 이 때에만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이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휴일이 아니라 ‘해방의 날’이었다. 서울 명동과 충무로, 종로 일대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거리는 하룻밤의 해방감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많은 청춘 남녀들이 밤새도록 거리를 배회하거나 고고장에서 몸을 흔들어댔다. ‘고고파티’와 ‘그룹미팅’도 성행했다. 이날 젊은이들의 실수로 태어난 아기들을 ‘크리스마스 베이비’라고 부르기도 했다. 해마다 성탄 비상경계령이 발동되어 경찰은 연중 가장 바쁜 날을 보내야 했다. 당시 크리스마스를 ‘크레이지마스’라고도 했다.
통금해제 후, 해방감을 만끽하고자 했던 청년 학생들이 즐겨 찾은 곳은 심야극장이었다. 컬러 TV 방송으로 불황에 시달리던 영화계가 통금해제 후 영화계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이트 쇼’라는 이름으로 시사회를 여는 등 심야극장 판촉에 공을 들인 결과이기도 했다.
통금해제 기념영화(?) ‘애마부인’
통금히 해제된 지 꼭 한 달 뒤인 2월6일 첫 심야 상영영화인 ‘애마부인’이 개봉했다. 개봉 첫날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극장 유리창이 깨졌고 지방에서 올라온 관객이 표가 없어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난리가 났다. 소문을 들은 일본 NHK에서 정인엽 감독과 배우 안소영 인터뷰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애마부인’의 정치학은 그것보다는 좀 더 복잡한 것이었다. 처음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극장을 찾은 학생들과 연인, 친구들은 ‘애마부인’을 보고 나와 종로3가를 메운 포장마차에서 밤을 새웠다. 정치상황은 살을 에는 겨울바람을 실감케 했지만, 스크린이 선사한 몇 시간 동안의 해방감마저 얼어붙게 만들지는 못했다. 어쩌면 정치적 자유에 대한 억압적인 통제와 탄압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해방감의 제공은 필수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탱크로 광주를 깔아뭉개며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폭압과 자유화라는 양날의 정책을 썼다. 교복과 통행금지 폐지 그리고 두발 자유화는 전두환 정권의 선물이다. 충무로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선물은 에로영화에 대한 검열완화였다. … 당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낮에는 전두환의 폭압정치에 맞서 돌을 던지고 밤에는 전두환의 자유화 정책에 발맞춰 싸구려 에로영화를 보며 킬킬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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