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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이정재 "자극 없으면 매너리즘 빠지기 쉽다…정우성과 작업 부끄럽지 않게 준비"
놀히타리 2020-12-23     조회 : 842

[2020 영화결산 릴레이 인터뷰]

[스타뉴스 전형화 기자]

이정재/사진제공=아티스트 컴퍼니
이정재/사진제공=아티스트 컴퍼니


코로나로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2020년 영화계를 마무리하며, 그 속에서도 빛났던 올해의 영화인들을 스타뉴스가 만났습니다. 첫 주자는 '남산의 부장들'로 2020년 의미 있는 성과를 낸 우민호 감독이며, 두 번째 주자는 '내가 죽던 날'의 김혜수며, 세 번째 주자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정재 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또 다른 이정재였다. '모래시계'를 비롯해 초창기 작품 속 이정재는 날 것이거나 틀 속에 갇혀있었다. 모순되고 자칫 깨질 것 같은 유리 같은 위태위태한 모습. 그랬던 이정재는 '신세계'와 '관상'과 '암살'을 거쳐 두터워졌다. 깨질 것 같았던 유리는 더 단단해졌다. 여전히 모순덩어리지만, 결이 달라졌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이정재가 보여준 레이는, 모순이 가득한, 그렇지만 두터워진 지금의 이정재였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 이정재가 출연한다고 한 건 사실 좀 의외였다. 황정민은 확실한 동기가 보였고, 박정민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정재는 굳이,라는 의문이 따랐다. 주인공도 아니고, 악역이고, 동기나 설명도 부족한 배역이기도 했던 터라.

▶정말 황정민이 한다고 해서 했다. 시나리오를 보고 정민이형이 한다고 해서 바로 전화를 했다. 정말 하기로 했냐고 물었더니 한다고 하길래, 알았어, 할께,라고 바로 말했다. (황정민은)'신세계' 때도 그랬고 정말 자기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배우다. 다시 같이 해보고 싶었고, 그러면 뭔가를 같이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다시 보면서 내가 여기서 할 만한 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스타일링으로 보여줘야겠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야 비로소 보이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원래 시나리오에선 레이가 설명도 적을뿐더러 영화와는 달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인물에 가까웠는데.

▶킬러니 눈에 안 띄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1차 헤어, 메이크업 회의했을 때는 그래서 평이했다. 그 뒤 나랑 오래 작업한 스타일리스트와 계속 상의를 해서 홍원찬 감독과 제작진을 상대로 PPT를 했다. 그랬더니 정말 이렇게 할 생각이냐, 너무 과한 게 아니냐는 의견들이 있었다.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직접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따로 준비했다. 날을 잡고 의상과 문신까지 다 해서 홍원찬 감독, 홍경표 촬영감독 등에게 보여줬다. 그랬더니 설득할 수 있었다.

-배우 이정재를 1기와 2기와 나눈다면, 2기의 시발점은 '신세계' 일 텐데.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시 수억원의 출연료를 주겠다는 드라마를 마다하고 출연료를 낮춰가며 '신세계'를 택했는데. 그전과 그 뒤로 소위 탈(배우가 얼굴로 보여주는 어떤 모습을 일컫는 영화계 은어)이 달라졌는데.

▶'신세계'는 분명 내 연기인생에 터닝포인트다. 어떤 사람들은 이정재는 '신세계'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고 하기도 한다. 글쎄, 어릴 적부터 가만히 서 있는데 감정이 드러나는 그런 연기를 정말 해보고 싶었다. 어릴 적에는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연기이기도 했고. '신세계'에서 그렇게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렇게 해도 되는 것 같더라. 그걸 했기에 일부러 다음 작품으로 '관상'을 택했다. 이번에는 발산하는 연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관상'도 사실 다른 배우 이야기가 먼저 있었고, 그 배우가 고사할 때까지 기다렸다. 뿐만 아니라 당시 '관상'에 이병우 음악감독을 쓰기 위해서 출연료를 크게 낮추기까지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했나.

▶난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오 브라더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내 얼굴과 연기를 보니 완전히 갇혀 있구나란 생각이 들더라. 항상 불안감이 있었다. 더 이상 반짝반짝하는 아이디어가 안 나오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서 자꾸 내 연기를 체크하고 있더라. 배우에게 자기검열이 꼭 좋은 건 아니다. 그런 매너리즘에서 빠져 나오고 싶었다. 그걸 피하려면 그럴 수 있는 작품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랬을 뿐이지, 무슨 거창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지금도 계속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으면 경계한다.

-그래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황정민과 호흡을 맞췄더니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게 하는 에너지를 얻었나.

▶역시 정민이형은 아이디어가 굉장했다. 일본에서 등장하는 장면이나 붉은색 렌즈를 미리 준비해서 오는 등 반짝반짝했다. 저 형이 저만큼 하면 나도 밸런스를 맞춰야 하니 더 고민하게 됐다. 자극을 계속 받았다. 역시 자극이 없으면 배우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것 같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레이는 첫 등장부터 강렬했다. 일본 야쿠자 장례식에 하얀색 롱코트를 입고 등장하다니. 이례적이고, 익숙한 것들과 선을 그은 느낌이던데.

▶장례식장에 흰색 롱코트를 입고 등장한다는 걸 우선 설득해야 했다. 나(레이)는 형이랑 별로 사이가 안 좋다, 진짜 죽었나, 보러 간 것이다. 다만 사이가 좋든 안 좋든, 가족을 건드렸으니 나를 건드린 것이다, 그러면 응징한다. 이걸 당위성이나 큰 설명 없이 보여주려면 그런 이질감이 느껴져야 한다고 설득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정재와 황정민 액션 장면. 이정재는 이 장연을 찍다가 왼쪽 어깨 인대가 파열됐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정재와 황정민 액션 장면. 이정재는 이 장연을 찍다가 왼쪽 어깨 인대가 파열됐다.


-사실 해외 촬영은 힘들다. 익숙하지 않으니깐. 더욱이 현장에서 바로바로 상황이 바뀌면 배우 입장에선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실제로 다치기도 했고. 왼쪽 어깨 인대가 파열됐다고 하던데.

▶해외 촬영이라는 게 정해진 무엇인가를 급하게 수정하면 모두가 피곤한 상황을 맞게 된다. 아무래도 준비해놓은 게 다 급하게 달라지니깐. 정민이형, 홍경표 촬영감독 등과 상의해서 해법을 찾은 뒤 그걸 홍원찬 감독과 계속 이야기하고 수정하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홍원찬 감독은 열려 있어서 잘 듣는 장점이 있다.

그렇게 만들어가다가 정민이형과 복도에서 처음 맞붙는 액션 장면을 찍다가 사고가 났다. 왼쪽 어깨 인대가 파열됐다.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라. 예전에 '빅매치' 때 오른쪽 어깨 인대가 끊어졌던 경험이 있다보니 바로 알겠더라. 그날은 왼쪽 팔이 아예 안 올라갔다. 방콕에 있는 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더니 4cm가 끊어졌다며 3kg 이상을 들면 안된다고 하더라. 한 달 안에 수술하라고 하더라.

3일 동안 촬영을 못했다. 그러다 팔이 조금씩 올라가더라. 그래서 다시 촬영을 했다. 주로 안 다친 오른팔로 액션을 했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후반부에 대체로 내가 오른팔로만 액션을 하는 걸 알 수 있다. 중간에 서울에 와서 병원을 찾았다. 세 곳을 갔는데 다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 수술을 못 받고 다시 방콕으로 가서 나머지 촬영을 계속 했다. 아직도 수술은 못 했다. 황동혁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 촬영에 곧장 들어가서 못 했다. 한 번 수술을 하면 9개월은 꼼짝없이 팔을 못 쓴다. 그래서 수술을 못 했다.

-왜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도 작품 촬영을 계속하나. 불안하나.

▶글쎄. 음. 생각해 보진 않았는데 질문을 받고 고민해보니 내가 살 길은 이거 밖에 없구나란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수술을 받으면 오래 연기를 못하고 그러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나머지 촬영을 못 한다. 그 뒤로도 수술을 받으면 황동혁 감독과 꼭 작업을 해보고 싶었는데 '오징어 게임'을 할 수 없게 된다. '오징어 게임'이 끝나면 '헌트'로 첫 영화 연출을 하게 되는데, 음. 수술을 받으면 그걸 또 같이 준비한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미뤄지게 된다. 그냥 이게 내가 사는 길인 것 같다.

이정재/사진제공=아티스트 컴퍼니
이정재/사진제공=아티스트 컴퍼니


-어릴 적에는 사업도 했고, 아티스트컴퍼니도 초반에는 대표를 하다가 어느 순간 다 놓고 배우로 또 감독으로 준비만 하던데. '남산'에서 '헌트'로 제목을 바꾼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하고.

▶솔직히 경영은 내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실 난 시나리오 쓰는 게 훨씬 재밌다. 7~8년은 된 것 같다. 어느 날 뉴스를 보다가 문득 멜로가 떠올랐다. 북한의 벌크선이 알고보니 무기 밀매선이었다는 뉴스였다. 그 뉴스를 보는데 저게 무기면 누군가는 저걸 파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외교관 여권으로 세계를 돌면서 무기를 파는 사람. 그 사람과 누군가가 제3국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을 누가 듣더니 일단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시나리오 작가와 같이 계속 시나리오를 썼다. 제작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재밌었다.

그러다가 '관상'을 같이 한 한재림 감독이 '남산'이란 스파이물이 있는데 어떠냐고 하더라. 좋았다. 판권 문제 등이 있었는데 어찌어찌 정리되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잘 안 됐다. 그 뒤 한재림 감독은 '더 킹'을 찍고, 난 '남산' 시나리오를 계속 써봤다. 멜로 시나리오를 써보니 쓰는 게 재밌더라. 그 뒤 정지우 감독과 최민식 선배가 '남산'에 관심이 있어서 준비를 하다가 역시 잘 안됐다.

그냥 놓을 수 없어서 시나리오를 계속 썼다. 그러다가 다시 한재림 감독이 '남산'에 대해 관심을 보여서 또 준비했다. 그때는 정우성이 고사했다. 하정우 이정재 이렇게 배우로 참여하려 했다. 또다시 잘 안됐다.

그 뒤로도 계속 시나리오를 쓰다보니 왜 계속 잘 안되는지 알겠더라. 그래서 계속 썼다. 그렇게 '남산' 시나리오를 한 4년 동안 썼다. 그 시나리오를 본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가 그 정도면 된 것 같고 당신이 가장 잘 알테니 연출을 직접 해보라고 권하더라. 나도 한 4년 동안 시나리오를 써보니 내가 연출을 해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헌트' 연출을 하기로 한 뒤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에 출연하게 됐다. 배우로서가 아니라 예비 감독으로 다른 게 보이던가.

▶황동혁 감독은 개념 미술가 같다. 이런 감독은 처음이다. 시나리오에 쓰인 한 줄이, 그중에 어떤 단어에 더 집중을 하는 지 보게 되더라. 그러면서 인물에 집중하고 그림 하나하나, 스태프 한 명 한 명에 정성이 느껴진다. 어떤 것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를 더 보게 되더라.

-예전에는 금방이라도 금이 가고 깨질 것 같은 위태위태한 유리 같았는데 이제는 그 유리가 두터워진 것 같다. 현장에서도 그렇게 된 것 같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예전에는 뭔가 더 잘해야지라는 생각만 많았을 뿐 방법을 잘 몰랐다. 점점 방법을 알게 되고 잘 할 수 있는 것과 잘 해볼 수 있는 것을 구분하고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덜 예민해지는 것 같다.

또 확실히 시나리오를 써보니깐 안 보이는 것도 좀 더 보이게 되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을 조금씩 더 알게 되니 더 어찌어찌 해보려는 것도 생기고. 뭔가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는 것 같다.

(정)우성씨랑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20년 넘게 배우 일을 했는데 앞으로 진짜 열심히 해도 15~20년 정도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뭐에 더 집중해야 할까란 이야기를 나눴다.

30대에는 이정재는 연기하면서도 비즈니스도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시기가 있었다. 다 부질 없는 짓이다. 지금 연기를 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준비하는 게 제일 행복하다.

지금은 '헌트'를 준비하는 데 영화란 게 혼자 하는 게 아니지 않나. 이모개 촬영감독님, '공작'을 했던 박일현 미술감독님, 김상범 편집감독님 등등을 한 분씩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게 너무 좋다. 그 분들이 '헌트' 시나리오 모니터를 하나하나 해주는 걸 듣는 게 너무 좋다. 김상범 편집감독님을 마지막에 뵙는데 그분의 이야기까지 다 듣고 시나리오를 또 수정하고 있다. 이런 과정들이 정말 행복하다.

-정우성과 '태양은 없다' 이후 '헌트'로 드디어 다시 연기 호흡을 맞추게 됐는데. 같은 회사고 친구라서 '헌트'를 같이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정우성이 그런 이유로 작품을 선택하는 배우가 아닌데.

▶4번을 거절 당했다. 한재림 감독이 다시 '헌트'를 준비하려 했을 때도 거절 당했다. 어떤 부분들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도 알겠고, 그 고민들도 4년 동안 내가 시나리오를 계속 쓰는데 도움이 됐다. 부끄러운 작품이 되지 않도록 잘 준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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