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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체페쉬
happykingdoom1004 | 2020.03.25 | 조회 341 | 추천 1 댓글 1

다들 소설이나 영화로 유명한 드라큐라 백작 얘기 아시죠? 이 백작의 실제 모델이 루마니아 공국의 왕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알아봤어요. 루마니아의 위대한 왕


루마니아 왕가

블라드 체페쉬

발라히아 공국의 가장 위대한 왕

[ Vlad the Impaler ]

요약 블라드 체페쉬로 널리 알려진 블라드 3세 드러쿨레아는 발라히아 공국의 영주로,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의 모델이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체페쉬는 루마니아 말로 가시, 꼬챙이 등 뾰족한 물건을 가리킨다. 그가 이런 별칭을 가지게 된 것은 죄인이나 전쟁 포로 등을 끝이 뾰족하고 기다란 장대에 꽂아 죽이는 잔혹한 처형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루마니아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위대하고 공명한 군주였다.




드라큘라의 모델이 된 발라히아 공국의 왕, 블라드 3세 체페쉬

드라큘라의 모델이 된 발라히아 공국의 왕, 블라드 3세 체페쉬원본보기

왕가바사라브 왕가의 방계인 드러쿨레쉬티 왕가
외국어표기Vlad III Drăculea
공식칭호 블라드 3세 드라쿨라
별칭블라드 체페쉬(Vlad Ţepeş)
지역 루마니아 남부 발라히아 공국
재위기간 1차 1448년 8월 ~ 1448년 10월, 2차 1456년 8월 ~ 1462년 12월, 3차 1476년
출생 - 사망 1431년 ~ 1477년
가족관계부친 : 블라드 드라쿨(Vlad Dracul)
모친 : 바실리사 무샤트(Vasilisa Mușat), 몰도바 공국의 왕인 알렉산드루 첼 분의 딸
계보전임자 : 블라디슬라브 2세(Vladislav al II-lea)
바사라브 라이오터 첼 버트른(Basarab Laiotă celtrân)
후임자 : 블라디슬라브 2세(Vladislav al II-lea)
라두 첼 프루모스(Radu cel Frumos), 바사라브 라이오터 첼 버트른(Basarab Laiotă celtrân)

‘드라큘라’로 알려진 블라드 체페쉬

블라드 체페쉬는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의 모델이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이름은 블라드 3세 드러쿨레아였지만, 사람들은 그냥 드라쿨라라고 불렀다. 루마니아어로 ‘드라쿨라’는 악마나 용을 뜻하는 ‘드라크’라는 단어에 소유격 관사가 붙은 형태로, ‘악마의’ 혹은 ‘용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블라드 3세가 드라큘라(루마니아어로 드라쿨라)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1431년 2월, 블라드 3세 체페쉬의 아버지 블라드 2세는 헝가리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지기스문트 왕으로부터 ‘용의 기사’ 작위를 받았고,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436년, 발라히아 공국의 왕위에 올랐다. 그 이후 그는 기사단을 상징하는 날개 달린 용의 문양을 동전에 새겨 발행하였고, 새로 짓는 교회들도 용의 문양을 넣어 건축하게 하였다. 따라서 용의 문양은 차츰 발라히아 공국의 상징물로 자리 잡았고, 루마니아 국민들은 블라드 2세를 블라드 드라쿨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루마니아어로 용을 일컬을 때 대개 ‘드라고눌’이라고 하지만, 당시 ‘드라쿨’이라는 단어는 용과 악마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블라드 드라쿨의 이름에 붙여진 ‘드라쿨’은 악마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용처럼 용맹하고 현실적인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루마니아 사람들은 용감하고 현실적인 영주였던 블라드 2세를 ‘블라드 드라쿨’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블라드 체페쉬 또한 ‘드라쿨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드러쿨레아’ 또는 ‘드라쿨라’라는 별칭1)을 붙여 주었다.

블라드 체페쉬는 공식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할 때 항상 블라드 드라쿨라로 서명했을 정도로 드라쿨라라는 이름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블라드 3세의 또 다른 별칭은 체페쉬이다. 체페쉬는 루마니아 말로 가시, 꼬챙이 등 뾰족한 물건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그가 이런 별칭을 가지게 된 것은 죄인이나 전쟁 포로 등을 끝이 뾰족하고 기다란 장대에 꽂아 죽이는 잔혹한 처형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블라드 체페쉬가 흡혈귀 드라큘라로 소개된 것은 1460년경, 브라쇼브와 시비우 시 등지에 거주하던 독일계 작센인 상인들과의 충돌 때문이었다. 당시 루마니아 내에서는 작센인 상인들이 밀매와 무관세 무역을 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상대적으로 루마니아 일반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체페쉬 영주는 작센인 상인들에게 적정한 세금을 부과하여 루마니아인들의 궁핍한 생활을 호전시키려 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책은 작센인 상인들의 반발을 샀다. 일부 작센인 상인들이 체페쉬 영주에게 노골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자, 그는 이들을 잡아 죄의 경중에 따라 혀, 코, 귀 그리고 성기 등을 자르거나 혹은 장대에 꽂아 처형하였다. 또한 400여 명의 작센인 가톨릭 도제들까지 산 채로 태워 죽여 버렸다. 이러한 과정을 독일어로 기록한 게르만 연대기 저술자들은 작센인들을 처참히 죽인 블라드 체페쉬 영주를 사악한 악마로 묘사하였다. 따라서 그는 서방세계에 잔혹하고 두려운 인물, 즉 흡혈귀 드라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체페쉬에 대한 소문을 우연히 접하게 된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소설가 브람 스토커(Bram Stoker)는 소설 『드라큘라(Dracula)』(1897년)를 출판하였고, 그 후 1931년 미국에서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가 제작됨으로써 드라큘라는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죄인들을 장대 끝에 꽂아 처형하는 장면

죄인들을 장대 끝에 꽂아 처형하는 장면1499년에 게르만(German)연대기에서 조각된 판화

재위 과정

블라드 체페쉬가 태어난 시기와 장소는 정확하지 않지만, 루마니아 역사학자들은 1431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시기쇼아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436년, 블라드 2세 드라쿨이 발라히아 공국의 왕위에 오른 후 도읍지를 트르고비쉬테로 옮기자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42년, 블라드 2세는 헝가리에 우호적인 귀족들에 의해 잠시 왕좌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조공을 받치고 또한 자신의 두 아들인 블라드 체페쉬와 라두 첼 프루모스를 오스만 튀르크로 볼모로 보낸 뒤 군사적 지원을 받아 왕위에 다시 복귀하였다. 1442년부터 1448년까지 오스만 튀르크의 왕궁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블라드 체페쉬는 자존심이 강해 볼모생활 중에도 터키인들의 불합리한 처사들에 거침없이 항의하는 등 갈등이 잦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그의 동생 라두 첼 프루모스는 블라드 체페쉬가 발라히아로 돌아간 이후에도 1462년까지 볼모생활을 계속하였다.

1447년, 블라드 2세 드라쿨과 형 미르체아 2세가 트르고비쉬테의 대지주들과 상인들에게 암살당하였다. 블라드 체페쉬는 그로부터 1년 후인 1448년, 오스만 튀르크의 지원을 받아 발라히아 공국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의 원수인 블라디슬라브 2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당시 오스만 튀르크의 무라드 2세는 친헝가리 성향의 블라디슬라브 2세가 발라히아 공국을 통치할 경우 남동부 유럽에서 오스만 튀르크의 입지가 약해질 것이라 생각하여 블라드 체페쉬를 지원하였던 것이다. 당시 블라드 체페쉬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두 달 뒤,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대귀족인 이안쿠 데 후네도아라의 지원을 받은 블라디슬라브 2세가 다시 반격해 오자 블라드 체페쉬는 자신의 외삼촌 보그단 2세가 통치하고 있던 몰도바 공국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1451년, 보그단 2세가 암살되자 다시 트란실바니아 지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1453년, 비잔티움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트 2세는 카르파치 산맥 너머 유럽 본토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넓혀갔다. 당시 블라드 체페쉬는 이안쿠 데 후네도아라를 찾아가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볼모생활을 이야기하며 오스만 튀르크에 대항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안쿠 데 후네도아라는 블라드 체페쉬의 아버지와 형의 암살을 배후에서 사주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철천지원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스만 튀르크의 유럽 진출을 막는다는 공동 목표를 위해 연합하였다. 당시 수도 비엔나가 오스만 튀르크의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안쿠 데 후네도아라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야사에 의하면, 메흐메트 2세는 동성연애자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블라드 체페쉬를 성추행하며 괴롭혔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이 당시부터 메흐메트 2세에 대한 적개심으로 와신상담했다고 한다.

반면, 성격이 유순했던 동생 라두 첼 프루모스는 메흐메트 2세의 요구를 받아들여 종교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그 이후, 발라히아 공국으로 돌아온 라두 첼 프루모스는 메흐메트 2세의 지원을 받아 블라드 체페쉬를 몰아내고 발라히아 공국의 왕위에 오른 뒤 친오스만 정책을 펼쳐 나갔다. 참고로, 라두 첼 프루모스는 루마니아어로 ‘잘생긴 라두’라는 뜻으로, 그 속에는 그의 동성애적 성향을 비꼬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재위 - 오스만 튀르크를 상대로 한 투쟁

1456년 블라드 체페쉬는 갖은 우여곡절 끝에 발라히아 공국으로 돌아와 블라디슬라브 2세를 처형하고 왕권을 되찾았다. 당시 그는 100여 명 밖에 되지 않는 군사로 왕궁을 점령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몰도바 공국의 쉬테판 첼 마레는 정치적 이유로 고종사촌지간인 블라드 체페쉬에게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1457년, 블라드 체페쉬는 쉬테판 첼 마레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6,000여 명의 군사를 지원해 주었고, 그는 몰도바 공국의 가장 위대한 군주가 되었다. 당시 블라드 체페쉬가 쉬테판 첼 마레를 도와준 것은 그 역시도 어려웠던 시절에 쉬테판 첼 마레의 아버지인 보그단 2세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1459년, 블라드 체페쉬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암살하는 데 동조했던 트르고비쉬테의 모든 귀족들을 부활절 연회에 초대한 뒤 충성심을 시험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자, 결국 나이가 제일 많은 귀족 한명을 본보기로 나무 장대에 꽂아 처형하였고, 나머지 귀족들과 그 가족들은 그곳에서 100km 이상 떨어진 아르제쉬 북쪽의 포에나리 성으로 끌고 가 폐허가 된 성을 재건하게 하였다. 당시 블라드 체페쉬는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해 재정을 확보한 동시에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험준한 산악 지대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같은 해, 오스만 튀르크의 메흐메트 2세는 발라히아 공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하였다. 당시 블라드 체페쉬 영주는 사신들에게 터번을 벗고 예의를 갖추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사신들은 “터번을 쓰는 것은 오스만 문화인데 어찌 남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느냐”며 오히려 그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 후, 블라드 체페쉬는 사신들의 문화를 존중해 준다면서 영원히 터번을 벗지 못하게 그들의 머리에다 대못을 박아버렸다. 그리고는 그 상태로 사신들의 시신을 본국에 돌려보냈다. 화가 난 메흐메트 2세는 당장 대군을 파견하려 했지만, 발라히아 공국의 동맹인 헝가리 군대의 지원을 염두에 두어 침공을 잠시 미루었고, 대신에 블라드 체페쉬를 암살하기 위하여 1,000여 명의 기마군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정보를 미리 입수한 블라드 체페쉬는 기마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군사들을 매복시켜 기마군을 모두 사살, 체포한 후 기다란 나무 장대에 꽂아 길가에 세워 두었다.

1461년 ~ 1462년 겨울, 오스만 튀르크 군복으로 변장한 블라드 체페쉬와 발라히아 군인들은 추운 겨울을 틈타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하에 있던 다뉴브 강 이남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그리고 흑해연안 지방을 공격하여 약 2만 명의 튀르크 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블라드 체페쉬는 깊은 밤 군대를 이끌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터키어로 “적군이 쳐들어왔다!”라고 소리쳐 적들을 혼란에 빠트렸던 것이다. 잠결에 누가 누군지 몰랐던 오스만 튀르크 군사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아비규환 상태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메흐메트 2세는 1462년 봄 12만 명의 대군과 175척의 거대 함선을 이끌고 발라히아 공국을 침공하였다. 당시 발라히아 공국의 군대는 겨우 3만 정도였는데, 전력 차이는 무려 4배에 이르렀다. 전쟁 초기, 블라드 체페쉬는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없애는 청야전술()을 이용하여 튀르크 군대를 괴롭혔다.

1330년, 발라히아 공국의 바사라브 1세가 헝가리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한 청야전술은 1475년에도 몰도바 공국의 쉬테판 첼 마레가 튀르크 군을 상대로 큰 성과를 거둔 전술이었다. 루마니아 중세 공국들은 굴곡진 지형과 울창하고 깊은 숲이 있어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청야전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블라드 체페쉬는 오스만 튀르크의 군대가 지나가는 마을에 미리 도착해 마을 사람들을 숲으로 피신하게 한 뒤, 들고 갈 수 없는 식량은 모두 불태우고 식수원도 독약을 풀어 마실 수 없게 하였다.

튀르크 군대는 본국으로부터 식량과 보급 물자를 지원받았지만 오랜 진군에 지칠 대로 지친데다 굶주림에 시달려 결국 식량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숲 속에 매복해 있던 발라히아의 군사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식량을 찾아 나선 튀르크의 정찰대들을 공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은 튀르크 병사들을 장대에 꽂아 적들의 눈에 잘 띄는 길가에 세워 두었다. 블라드 체페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더 대담한 작전을 구사하였다. 야밤을 틈타 스스로 적진에 잠입하여 술탄 메흐메트 2세를 암살하려 하였다. 하지만 술탄의 막사를 잘못 알고 침입하는 바람에 술탄 대신 튀르크 장군 한명을 암살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결국, 메흐메트 2세는 전면전을 잠시 중단하고 오스만튀르크의 왕궁에서 볼모생활을 하고 있던 블라드 체페쉬의 동생 라두 첼 프루모스를 발라히아 공국으로 불러들였다. 메흐메트 2세와 막역한 사이였던 라두 첼 프루모스는 발라히아 귀족들을 회유하여 블라드 체페쉬를 배신하게 하였다. 결국, 블라드 체페쉬는 귀족들의 배신으로 오스만 튀르크의 군대에 쫓겨 마지막 보루인 포에나리 성으로 피신하였다.

성 주위를 포위한 메흐메트 2세는 다음 날 전면 공격을 단행하여 그를 체포하려 하였다. 하지만 터키 진영에서 염탐 활동을 하던 루마니아 병사가 이 계획을 알아내고는 급히 피신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블라드 체페쉬에게 알렸다. 편지를 읽은 체페쉬는 그날 밤 지하 비밀통로를 통해 인근의 산을 넘어 트란실바니아로 도피했지만 도주에 실패한 그의 부인은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 발라히아 공국은 라두 첼 프루모스가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블라드 체페쉬와 오스만 튀르크 사신

블라드 체페쉬와 오스만 튀르크 사신

세 번째 재위 그리고 최후

1462년 말, 트란실바니아 지방으로 피신한 블라드 체페쉬는 발라히아 공국의 왕권을 되찾고 오스만 튀르크와 계속 싸우기 위해 헝가리의 마테이 코르빈 왕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마테이 코르빈 왕은 이전에 헝가리 왕국에게 충성을 다하던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작센 상인들과 도제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블라드 체페쉬의 죄를 물어 체포하였다.

결국 그는 12년 동안을 헝가리에서 볼모로 잡혀 있어야 했다. 원래 정교회 신자였던 블라드 체페쉬는 헝가리인들과 작센인들로부터 호감을 사기 위하여 거짓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동시에 과거의 폭정을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마테이 코르빈 왕은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 중에 안타깝게 부인을 잃은 블라드 체페쉬를 자신의 사촌 누이와 결혼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1475년, 몰도바 공국을 공격한 오스만 튀르크가 트란실바니아 지방까지 위협하자 마테아 코르빈은 어쩔 수 없이 튀르크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였다. 튀르크와 대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블라드 체페쉬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마테이 코르빈 왕은 1476년 블라드 체페쉬가 발라히아 공국의 왕권을 되찾을 수 있게 군대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의 세 번째 재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발라히아 공국의 귀족들에게 암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블라드 체페쉬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던 발라히아 귀족들은 이전에 그를 배반했던 일로 자신들이 극형에 처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선수를 쳐 암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블라드 체페쉬의 시신은 부쿠레쉬티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스나고브 수도원 인근에 안치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오지만 아직까지 그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블라드 체페쉬 왕과 관련된 전설

1400년대 후반에, 블라드 체페쉬 영주는 계속되는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국내적으로 사회통치를 아주 엄하게 실시하였다. 물건을 훔치거나 게으른 사람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 사람들도 잔인하게 처형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체페쉬 영주는 거지와 방랑자를 적대시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왕궁에 거지들과 방랑자들을 초대하여 이들이 실컷 먹을 수 있도록 음식과 술 그리고 입을 옷가지 등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 그는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이들을 한곳으로 몰아넣고는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신의 공국을 말 그대로 거지와 방랑자가 없는 ‘깨끗한 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번은 체페쉬 영주가 공국 내의 모든 상인들에게 낮에 번 돈을 상점에 그대로 두고 갈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밤이 되자 그는 몇몇 상점을 들러 상인들이 두고 간 돈을 다른 상점에 두고 나왔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그는 상인들을 불러 상점에 둔 돈의 액수를 물어봤는데, 만약 돈의 액수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거짓으로 부풀려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항문에다 장대를 꽂아 극형에 처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을 살펴보면, 발라히아 공국의 어느 한 지주가 1,000레이(루마니아 화폐단위)가 들어 있는 돈주머니를 잃어버렸는데, 돈을 찾아주는 사람에게 사례금으로 100레이를 준다고 약속하였다. 한 사람이 그 주머니를 찾아 지주에게 건네주었지만 지주는 사례금을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이 사례금으로 약속한 만큼의 액수인 100레이가 없어졌다고 말하며 답례를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블라드 체페쉬 영주를 찾아가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고, 결국 체페쉬 영주는 지주의 돈주머니에는 1,000레이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900레이가 들어 있는 돈주머니는 지주의 것이 아니라고 판결 내린 후 그것을 주운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또한 이후에 누군가 1,000레이가 들어 있는 돈 주머니를 찾으면 그때 지주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전설은 다른 형태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전반적인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차이점은 판결을 내리는 부분에서 체페쉬 영주가 지주의 돈을 빼앗아 평민에게 주는 대신 거짓말을 한 지주의 항문에다 뾰족한 장대를 찔러 극형에 처한 것이다.

이 외에도 어느 날 블라드 체페쉬 영주는 심하게 헤진 옷을 입고 있는 어느 한 사람을 보고 그에게 부인이 있는지, 만약 있으면 건강한지 또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아내가 있긴 하지만 게으르다고 대답했고, 이에 체페쉬 영주는 명을 내려 여자의 양손을 자르고 항문에다 장대를 찌르는 극형을 처하였다. 대신에 그 사람에게는 아주 예쁘고 부지런한 여자를 새 부인으로 맞이하게 하였다.

또 다른 전설로는, 언젠가 체페쉬 영주의 왕궁에 두 명의 수도사가 방문했다고 한다. 장대에 찔려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옆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는 체페쉬 영주의 모습을 본 한 수도사는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죽기 때문에 순교자라고 말했고, 다른 수도사는 그 사람들이 악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정의를 위해 처형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체페쉬 영주는 첫 번째 수도사를 순교사로 만들기 위하여 똑같이 그의 항문에다 장대를 찔러 처형하였고, 다른 수도사에게는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서는, 체페쉬 영주가 통치하던 시기에 발라히아 공국의 어느 한 지역에 아주 깨끗하고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우물은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고, 또한 우물 주위에 물을 떠서 먹을 수 있는 금으로 된 물 잔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훔쳐가지 않았다고 한다.

전설 속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당시 항문에다 장대를 찔러 세워 두면 대개 바로 죽지 않고 엄청난 고통 속에서 약 3일 동안 생존했다고 한다. 무게에 따라 장대가 몸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달랐기 때문에 생존 시간이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장대가 사람 몸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면 결국에는 앞가슴 부분이나 등 뒤로 튀어나와 죽게 되는데, 이러한 처형 방법은 아주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몸무게가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빨리 죽을 수 있어 역설적으로 더 행복했다고 한다.

이처럼, 체페쉬 영주는 자국의 사회통치 강화를 위해 아주 무자비한 방법으로 처벌을 내렸기 때문에 발라히아 공국에서는 도둑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공국 내의 모든 정직한 상인들은 자신의 재산을 빼앗길 걱정 없이 생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족 관계

블라드 3세는 세 번 결혼하였다. 블라드 3세와 첫 번째 부인인 헝가리 귀족 출신의 크나에자 바토리 사이에는 라두와 블라드가 있었고, 두 번째 부인인 트란실바니아 대지주 출신의 주스치나 실라기 사이에는 미하일과 미흐네아 첼 러우가 있었다. 또한 세 번째 부인인 일로아나 넬리픽 공주는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헝가리 왕 마티아 코르빈(헝가리어로는 휴냐디 마차시)의 사촌 여동생이었는데, 슬하에는 딸 잘레스카가 있었다. 이들 중 미흐네아 첼 러우는 이후에 발라히아 공국의 왕이 되었다.

블라드 체페쉬의 후손들은 중세 루마니아의 두 공국인 발라히아 공국과 몰도바 공국 그리고 트란실바니아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뿐만 아니라, 블라드 체페쉬 가문의 공주들은 서유럽 국가들의 왕들과 결혼하였다. 한 예로, 영국의 찰스 황태자는 BBC방송에서 자신을 비롯한 영국 왕실은 블라드 체페쉬와 혈연적 관계에 있다고 밝히면서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1996년, 그는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비스크리 지역에 있는 별장 한 채를 구입한 후, 그 이후로 손님들을 초청하여 휴가를 함께 보내고 있다.

• 배우자
-
크나에자 바토리(Cnaejna Bathory)
- 주스치나 실라기(Jusztina Szilagyi), 트란실바니아 대지주 출신
- 일로아나 넬리픽(Ilona Nelipic), 공주는 헝가리 왕 마티아 코르빈의 사촌 여동생

• 자녀
크나에자 바토리 소생
- 라두(Radu)
- 블라드(Vlad)

주스치나 실라기 소생
- 미하일(Mihail)
- 미흐네아 첼 러우(Mihnea cel Rău), 발라히아 공국의 왕

일로아나 넬리픽 소생
- 딸 잘레스카(Zaleska)

참고문헌

  • Boris Crǎciun, Regii și Reginele României, Editura Porțile Orientului, Iași, 1999년
  • Constantin C. Giurescu, Istoria Românilor, Ed. All Educațional, București, 2003년
  • Florin Constantiniu, O istorie sinceră a poporului român, Editura Univers Enciclopedic, 2012년
  • Neagu Djuvara, O scurtă istorie a românilor povestită celor tineri, seria Istorie, Humanitas, 1999년
  • V. Mărculeț, A.V. Ștefănescu, S. Ion, Gherghina Boda, G. Marcu, M. Chiriac, Elena-Gabriela Maximciuc, I. Mărculeț, S. Stoica, Dicționarul domnilor Țării Românești și ai Moldovei, Ed. Meronia, București, 2009년

    [네이버 지식백과] 블라드 체페쉬 [Vlad the Impaler] - 발라히아 공국의 가장 위대한 왕 (루마니아 왕가, 박정오, 이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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