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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토크 | ||||||||
[충청도] 기억속으로 호야 | 2011.12.15 | 조회 30,096 | 추천 54 댓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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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꽃이 피고 지고 목련도 피고 지니 어느덧 여름이 왔다. 그 여름도 성큼 지나서 조금 있으면 방학을 시작할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태석은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쓸쓸해 보였다. 약간 고개를 땅으로 숙이고 걷는 모습이 처량하기까지 했다. 교문을 나서며 '휙'하고 허공에다 발길질을 하는데 그의 단짝 박성일이 태석의 어깨 위로 올라탔다. "야! 독뿔!" 힘없이 걸음을 휘청댄 태석은 다시 힘없이 고개를 들어 성일을 바라봤다. "십탱이... 독뿔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뭐 어뗘? 둘밖에 없는디. 그람 조또라고 불러줄까이?" 성일의 사투리가 제법 구성졌다. 장항은 충남과 전북의 경계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이곳 사람들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투리를 섞어가며 쓰곤 했는데 지금 성일이 그랬고 어느덧 서너 달을 지내온 태석도 마찬가지였다. "에라이... '시절'같은 놈아!" 태석이 말한 '시절'이란 충청도 사투리로 바보라는 뜻과 같았다. "그나저나 너는 왜 보충수업을 안 하는 것이여? 공부도 제법 하는 것 같은디? 대학 안 갈 것이냐?" "조또... 뭔 놈의 대학이냐..." "그럼? 안 갈 것이여?" "모르겄다." 태석은 맘이 불편한지 다시 허공에다 발길질을 했다. "조또야! 그건 그렇구 토요일에 민수 생일이라고 파티 한다든디... 안 갈 것이냐?" "시절... 거길 왜 가?" "민수네 조또 부자여. 가면 맛난 것도 많을 것이고 비디오 테잎도 많을 것인디?" "미친놈... 애냐? 그런 걸루 거길 가게?" "이지도 간다구 하던디?" 태석이 성일을 흘깃 쳐다봤다. "흠... 초대는 받은 것이냐?" 윤이지도 간다는 말에 태석의 맘이 바뀐 모양이다. "초대는 뭔 놈의 초대여? 곰팡이 냄새나는 범생이 놈들하고 예쁜 깔라[여자아이]하고만 초대 받았겄제?" "근디 뭐하러 갈려구 그런다냐?" "민수 그 새끼 싸가지 없어서 깽판치려구 갈라구 한다. 그리구 덕택에 맛난 것도 먹어야 할 거 아녀?" "에라이...!" 태석이 장난스레 성일의 뒤통수를 쳤다. "싫음 말그라. 나라도 혼자 갈텡께. 대신 이지는 내가 갖는겨!?" "이 십팅아! 조까!" 이런 얘기가 나올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서도 성일은 태석을 약올리는 일에 재미를 느꼈다. "이지는 절대 안돼! 알겄냐?" "그람 민주라도 내가 갖자!?" "빙시... 니 꼴리는대로 해부러." 태석은 귀찮은 듯 등을 돌렸고 다시 집으로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때 낮은 통 굽의 단화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학교 여학생들이 주로 신는 신발의 소리였다. "오빠!" 목소리를 알아들은 태석은 뒤도 안 돌아보고 계속 앞으로 걷기만 했다. "오빠!" 그 소리는 금새 등뒤까지 왔고 숨을 헐떡이는 소리도 들렸다. "으메... 민주 왔구나이?" 그렇다. 바로 강민수의 여동생 강민주였다. 강세나라는 이름으로 가수가 됐고 훗날 이유 모를 자살로 세상을 등진 그녀. "오빠...!" 세 번을 부르자 태석은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여전히 등은 돌리지 않고 있었다. "아따... 민주가 부르는디도 얼굴 한 번 뒤로 돌리지 않냐?" "십팅이..." 태석은 모르는 척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오빠! 잠깐만 서봐!" 민주는 두 팔을 벌려 앞길을 막았다. "왜 또...?" 그녀의 얼굴이 햇살을 머금었다. 양 볼에는 여드름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아직은 앳되기만 했어도 유난히 하얀 얼굴에 선 굵은 쌍꺼풀은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오빠...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있지?" "없다." 짧게 대답한 태석은 다시 민주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아 십팅... 조또 비싸게 굴어 쌌네..." 성일도 지나치게 냉정한 태석을 비아냥거렸다. "토요일에 우리 오빠 생일이야. 그때 오빠도 꼭 와야 돼!" "지미... 고작 한다는 말이 그것이여? 지 오빠 생일에 왜 지가 나서고 지랄이여? 지랄이길?" 민주의 안색이 변했고 말이 심했다고 느낀 태석은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지 말구... 꼭 와!?" "알았다. 민주야! 나가 꼭 데리고 갈텡께... 걱정 말거라이!?" 그렇게 둘은 다시 갈 길을 걸었고 민주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남아 있었다. "조또야! 민주가 지금 고 1 이라고 혀도 보기보다 성숙하고... 그리고 맘도 지 오빠랑은 달라서 곱기만 한디... 거기다가 딱 좋은 세 살 차이 아니겄냐... 앞으로의 일도 있고 허니... 이지 나 주고... 넌 민주 갖거라... 잉?" 태석이 던진 책가방은 도망가는 성일의 뒤통수를 정확히 때렸다. 학교에서 15분을 걸어 도착한 집은 나지막한 동산이 뒤에 펼쳐져 있었다. 녹음으로 우거진 그 동산에선 연신 매미가 울어댔고 그 시끄러운 소리에 태석은 짜증부터 났다. 마당에는 중년의 한 여인이 조신한 몸짓으로 뭔가를 갈고 있었는데 그건 날이 잘 선 작두였고 그 여인은 태석의 어머니였다. "태석아!" 태석은 못 들은 척 툇마루를 지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태석아!!" 뭔가에 기분이 상했는지 하루종일 언짢은 태석은 간단한 대답조차 하기 싫었다. 태석의 어머니는 작두를 갈던 일을 멈추고 태석의 방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요 며칠 이 어미의 꿈자리가 뒤숭숭한 것이 영 불안한디... 신령님께서 뭔가를 말해주시려는가 부다... 그게 태석이 니 눔하고 상관이 있는 것 같어..." 방바닥에 누워있던 태석은 애써 등을 돌렸다. "벌써 100일도 더 지났는디... 이제는 말하면서 살 때도 되지 않았냐...? 아무리 무당이라고 혀도 니 에민겨... 아무리 에미 같잖아도 니 에민겨... 휴우..." 한숨을 길게 늘인 태석의 어머니는 다시 작두를 갈기 시작했다. "그려... 에미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겄제... 나도 다 알어... 근디... 오갈 때마다 눈이라도 마주쳐야 사람인겨..." 잔뜩 몸을 구부린 태석은 얌전히 듣기만 했는데도 괜히 마음이 아파 왔고 괜히 눈물이 글썽거렸다. "에구... 쉰도 안 된 이내 몸이 벌써부터 죽을 궁리만 하는 것이... 니 눔만 마음에 걸리는 구먼..." 글썽이던 눈물이 방바닥으로 소리 없이 떨어졌다. '지미...' 태석은 베개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엄니! 지들 왔유!" 이렇게 말한 태석은 들고있던 책가방을 마루로 던져버렸다. 이에 질세라 옆에 있던 이진수도 '휙'하고 가방을 던졌다. "잡것들! 또 뭐할라구 온 것이여?" 쌀을 씻던 박성일의 노모가 면박을 주었어도 그것은 반가움을 대신하는 말이었다. "흐미... 지들 오는 줄 알고 밥하고 계셨구마이?" 이진수가 능청을 떨자 성일의 노모가 바가지에 물을 받아 진수에게 끼얹었다. 친부모보다 더 가까운 정이 느껴졌다. "성일이 있지라?" "오늘 반굉일이라고 일찍 오더니만 지 방에서 쳐자빠져 자는구먼." 토요일을 시골에선 반공일이라고 했고 성일의 노모는 끝끝내 반굉일이라고 했다. "엄니! 사실 성일이 성이 오늘 일찍 온 건 말이요. 반굉일이라서가 아니라 핵교를 왔다가 두 시간만 하고 그냥 가버렸어라..." "흐미... 이 잡것! 그럼 그렇지..." 노모도 지쳤는지 이진수의 고자질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 넘겼다. "근디... 니들은 책보[책가방]도 안 놓구 온 거 보니 집에도 안 들린겨? 그럼 이 시간까정 뭐하고 있었다냐?" "사실은... 읍내 나가서 태석이 성하고 당구 치고 왔유." "니들도 아주 깡패 될라고 작정들 한 겨?" "엄니! 요즘은 당구장에 깡패 없유." 태석의 변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모는 걱정을 늘어놓았다. "그려도 아직은 당구장 가는 거 아녀... 당구장 가봐야 맨 날 그놈이 그놈 아니겄냐... 깡패 아니믄 다방 색시들이겄제..." 밖에서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깬 성일이 기지개를 켜며 마루를 나섰다. "뭔 일로 온 겨?" 성일의 하품이 늘어졌다. "뭔 일은 뭔 일이겄수? 그냥 심심해서 온 것이제." 이진수는 제 집을 온 것처럼 대답했다. "근디 니 눔 오늘 또 핵교 땡땡이 쳐부렀냐?" 진수의 고자질을 성일의 노모도 그대로 일러 바쳤다. 성일이 옆에 있던 빗자루를 던지는 것으로 고자질에 대한 대가는 끝났다. "태석이 네 놈도 민수 생일 잔치에 갈려구 온 것이제" "시절..." 태석의 대답은 거짓이었다. 사실은 윤이지 혼자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성일을 핑계삼아 같이 가려고 온 것이었다. 이진수는 당구를 치며 잘 꼬셔놨으니 덤으로 같이 갈 것이다. "쪼까만 기둘려라이... 금방 씻고 갈텡께." 성일의 머리카락은 짧아서 감고 말리는 걸 아주 빨리 끝냈다. 마른 수건으로 몇 번 '툭툭'터는 것으로 씻는 게 끝났다. "잡것들! 또 어딜 몰려가려구 하는 것이여?" "강 부자 댁 아들이 오늘 생일이래유." "거길 니 눔들이 뭐 하러 가?" "우리보고 꼭 오라고 했응께 가쥬." "미친놈들! 강 부자가 니들보구 잘도 오라구 했겄다." "아들이 오라구 했응께 가쥬. 아무튼 댕겨 올께유." "밥이나 쳐먹고들 가." 노모의 정이 고스란히 묻어 났다. 끼니는 챙겨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아따... 맛난 거 얻어먹으러 가는디 무신 밥이라요? 엄니는 걱정도 팔사쇼!" 이진수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슬그머니 태석의 손목을 잡았다. "니 눔도 갈 껴...?" 갑자기 걱정스런 눈빛을 보이는 노모. 태석은 이유를 몰랐다. "그럼유. 가야쥬. 근디 뭔 일 있유?" "아녀... 알겄다. 후딱 가서 해 넘어가지 전까지 와. 엄니가 상추쌈 준비해줄 텡께." "아따... 맛난 거 배부르게 먹고 올 것이니께 엄니는 성기하고 저녁 드쇼." 성일은 그렇게 노모를 안심시키고 둘과 함께 강민수의 집으로 향했다. 셋은 논길을 따라 강민수의 목장으로 가고 있었다. 성일은 큰길보다는 논길이 지름길이라며 둘을 안내했고 그렇게 논길과 포도밭 사이를 가르고 나가니 때지은 젖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그 저 논뙈기부터 저그 야산까지 다 민수네 땅이여. 논허구 밭허구는 말할 것두 없구 목장부지만 혀도 삼만 평도 더 된다구 하드라." 성일은 부러운 듯 그렇게 주절거리며 앞장섰다. "원래 사는 집은 읍내인디 지 아부지 눈치 안 볼라구 여서 생일파티 하는가 보더라. 근디 시방 몇 시나 되부렀냐?" "네 시가 좀 넘었는디유?" "아따... 벌써 시작해부렀겄는디? 우리도 후딱 가야쓰겄다." 성일이 걸음을 재촉하자 태석도 마지못해 뒤를 따랐다. 목장 주위에는 얇은 철사 줄이 '주욱' 드리워져 있었는데 소가 도망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잠깐잠깐 전기를 흘리니 만지면 큰일 난다며 성일이 그 철사 줄을 나무 막대로 넘겨주었고 태석은 그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갔다. "흐미... 집 좀 봐야. 저것이 집이여? 아님 그림이여!?" 성일의 말이 사실이었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집이 나왔다. 넓은 초원과 나지막한 동산이 거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지기미... 목장 안에 있는 별채가 저런디 읍내에 있는 집은 어떻겄어?" 성일의 꿍시렁은 부러움이 반이었다. "성도 처음이유? 민수 부모님 잘 안담서?" "아부지는 잘 모르고 민수 엄니는 잘 안다. 무지하게 깐깐한디 그래도 나한테는 잘해준다야... 사실 목장 윤 씨 아저씨 만나 뵈러 몇 번 오기는 했는디 별채는 처음여." 집 앞에 다다른 셋은 이유 모를 심호흡을 했다. 초인종 대신 현관문을 두드리자 한 아주머니가 마중을 나왔는데 성일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이 아마도 강민수의 어머니 같았다. "성일이 왔니? 친구들하고 같이 왔구나? 그래 어서들 오거라." 또박또박한 서울 말씨. 잘 꾸며진 외모. 아무래도 이곳 사람이 아님이 분명했다. "다른 아이들은 진작부터 와있었는데 조금 늦었구나." 현관문을 들어서자 상당히 넓은 거실이 나왔는데 거기에는 같은 반 친구들이며 다른 반의 아이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주인공인 강민수는 맨 윗자리에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윤이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길쭉한 상위에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태석이 왔구나." 윤이지가 제일 먼저 태석을 반겼다. 그런데 나머지 아이들은 태석의 일행을 보더니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민주가 태석을 보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반가워했다. "흐미... 우리들도 왔어야. 우리는 안 반기는갑네... 진수야! 우리 가야쓰겄다." 성일은 괜한 엄살을 부리며 등을 돌렸다. "기왕 왔으니 앉지 그래..." 강민수가 건넨 말은 당연히 그냥 하는 인사치레였고 듣는 사람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성일에게 말을 놓는 학생은 장항 고등학교에서 태석과 윤이지 그리고 강민수 뿐이었다. 동갑내기 친구가 아닌 강민수는 공부 잘하고 집안이 좋은 이유의 특권이었다. 성일은 늘 강민수가 고까웠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래. 오빠야! 여기 앉자." 태석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한 민주가 태석을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윤이지와 다른 학생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물론 윤이지의 옆자리는 민주 것이었다. "얘는 좀 알겠는데 얘는 누구니...?" 과일을 내오던 민수의 어머니가 이진수와 태석을 번갈아 보며 성일에게 물었다. 태석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 야요? 야는 올 봄에 전학 온 제 친구지라... 이름은 강태석이고 저 앞에 앉은 이지하고 같은 날 전학왔지라." "어! 그래? 성일이하고 친구면 나이가 우리 민수보다 한 살이 많겠구나? 우리 민주가 오빠라고 부르며 잘 따르는 걸 보니 공부도 잘하는 모양이지?" "야... 그라지라. 민수가 전교에서 1등이고 야 태석이가 전교에서 2등이지라." "오!? 그래? 내가 얼마동안 학교를 안 가봐서 잘 몰랐구나.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거라." 태석은 전교에서 2등을 해본 적이 없다. 그냥 중 상위권이었다. 친구를 위한 거짓말치고는 정도가 심했다 싶었는지 성일이 다른 아이들을 보며 멋쩍게 웃어 넘겼다. "많이 먹고 더 먹고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라." "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주방으로 향하던 민수의 어머니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이렇게 물었다. "성일아!" "지유?" "근데 태석인 어디 살고 부모님은 어떤 분이시니? 한 번 찾아가 인사라도 해야겠구나." 성일이 말한 거짓이 화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쟈 아버님은 안 계시구 어머님만 계시는디유. 엄니는 감나무 집 무당이지라." 바로 그때. 성일의 얘기를 들은 민수 어머니가 들고있던 쟁반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뭐에 놀랐는지 얼굴 근육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쟤가... 그 애니... 설마 했는데... 정말로 돌아왔구나..." 분위기는 갑작스레 어두워졌고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민수 어머니와 태석을 번갈아 보기만 할뿐이었다. "성일아...! 잠깐... 나 좀 볼래?" 영문을 모르는 성일은 죄지은 사람처럼 주방으로 불려 들어갔다. 태석은 자기 때문에 갑자기 분위기가 안 좋아진 것 같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이유는 나중에 알더라도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주방에서 나온 성일이 난처한 표정으로 태석을 밖으로 불렀다. "조또야! 너 혹시 민수 엄니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는 겨?" 다짜고짜 이렇게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너 민수 엄니 처음 뵙는 것이제?" 태석은 고개만 끄덕였다. "근디 뭔 일이다냐...?" 성일은 다시 난처한 표정을 보였고 태석은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었다. "지미... 부자들은 다 그런겨? 조또 우리 그냥 가야쓰겄다." 성일은 위로라도 하듯 태석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민수 엄니가 나보고 나가라고 하디?" "여기 있으면 또 뭐할 것이여? 여기 온 우리가 잘못이지..." 성일의 이런 말은 아무런 위로가 안 됐다. "나가라고 하디?" 성일은 대답대신 태석을 이끌었다. "이거 놔! 십팅아! 나가라고 하더냐고 묻잖냐!?" 태석이 성일의 팔을 뿌리쳤다. 성일은 자기가 미안한 듯이 말을 흐렸다. "지기미... 생일 파티에 와서 이게 웬 개망신이여... 하도 정중하게 부탁하셔가지고야 이유도 못 물어봤당께... 미안하다... 친구야...!" "병신...! 나 혼자 갈라니까 넌 여서 있어라이." 태석은 너무 화가 나서 괜한 성일에게 화풀이를 했다. "어딜 혼자 갈려구햐? 같이 가야 할 거 아녀?" "조까! 십팅아!" 태석은 황급히 민수의 집에서 벗어났다. 집에 돌아온 태석은 화가 덜 풀렸는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방안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집어 던졌다. 스물의 철없는 태석에겐 가슴에 못이 박히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단지 자기의 어머니가 무당이라는 이유 때문인 것처럼 괜하게 어머니만을 원망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20년을 얼굴도 모르고 살다가 갑작스레 존재해버린 어머니. 어머니는 무당이었고 태석은 무당의 아들이었다. 마당에서 모레 있을 굿을 위해 음식을 준비중이던 태석의 어머니가 심통이 가득한 태석이 마음에 걸렸는지 툇마루에 걸터앉아 태석을 불렀다. "태석아!" 태석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이눔아! 뭐 땜이 그리 심통이 난 겨?" 태석은 대답 대신에 들고있던 책가방을 문을 향해 던졌다. 덕택에 창호지로 발린 문짝이 박살났다. "아이구... 저눔의 승질머리하구는... 말을 혀야 알 거 아녀? 용돈이 부족한 겨?" "누가 용돈 땜시 그러유!?" 태석이 툇마루로 뛰쳐나왔다. "그럼 말을 혀봐!" '엄니는 왜 무당이유?' 가슴속에서 복받치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증말 말 안 할 것이여? 그럼 한숨 자구나서 야그하자..." 태석의 어머니는 힘없이 일어나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골투가지 그만 부리고야 한숨 자그라... 그리구 나서 야그하자." 햇볕이 쨍쨍한 마당 복판에서 어머니는 다시 작두 날을 갈고 있었는데 그것조차도 못마땅한지 태석이 좀 전의 일을 어머니에게 묻기 시작했다. "민수 엄니 알쥬?" "민수 엄니?" "저 포도밭 너머 목장 하는 강 부자 댁 말이유." 태석의 어머니가 갑작스레 태석을 돌아보았다. "알쥬?" "..." "알쥬!?" "왜 그러는 겨?" "아느냔 말이유?" "이눔아! 한 동네에서 오십 평생 살았는디 그럼 모르겄냐?" "혹시 죄지은 거 있유?" "뭐여!?" "죄 지은 거 있느냐구유?" "시방 뭔 소리여?" "그럼 왜 날 쫓아낸대유?" "뭐... 뭐여? 시방 뭐라고 한 겨...?" 어머니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걸 본 태석은 괜한 얘기를 꺼낸 건 아닌가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럼... 민수하고 그 에미를 만났다는 겨? 니가 민수를 어찌 아는 겨? 그리고 민수 에미는 어찌 만난 겨?" "민수라는 놈하고 같은 반이니께 아는 거쥬." "민수가 니보다 한 살이 어릴 것인디 어찌 같은 반인 겨?" "참 나...!" 그렇다. 태석의 어머니는 태석이 1년을 휴학해서 아직 고3인줄은 모르고 스무 살이면 의당 고등학교 3학년인줄 아는 것이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여수댁의 아들 성일도 그랬으니 그렇게 알고 지낼 법도 했다. "이런 잡것...!" 태석의 어머니는 허공에 대고 민수의 어머니를 욕했다. "그 잡것이 니한테 뭐라고 한 겨?" 괜한 얘기를 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태석은 등을 돌렸고 그의 어머니는 태석의 등에다 대고 좀 전의 일을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뭐라고 했느냐구?" "됐유!" 태석은 망가진 방문을 걸어 잠갔다. "행여나 그 집 식구들은 절대 상종하지 말그라이... 절대 그러면 안 되는 겨... 절대 안 되는 겨... 이 에미의 부탁잉께 꼭 새겨 듣거라이..." 이유를 알고 싶은 것보다 짜증이 더한 태석은 베개에 머리를 박고는 잠을 청했다. 어머니의 말대로 짜증이 날 때는 그냥 잠이나 자는 게 속이 편할 것이다. 다음날엔 갑작스레 많은 비가 내려 온 대지를 적셨다. 그 비는 세상의 모든 먼지를 씻어 내린 듯 또 다음날의 세상을 맑게 해주었다. 그렇게 유난히 맑은 오늘. 태석의 집에서는 새로운 신딸을 맞이하기 위해 태석의 어머니가 직접 굿판을 벌인다. 학교에서 일찍 귀가한 태석은 집 뒤의 낮은 동산에 올랐다. 동산 중턱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멋들어지게 서있었는데 그 소나무는 시원한 그늘은 물론 안락한 등받이 역할도 해주었다. 집에 오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나무에 몸을 기댄 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곤 했고 지금도 역시 그랬다. 맘껏 몸을 뉘여 슬며시 눈을 감고는 한 개피의 담배로 며칠 전의 고민을 되새기고 있었다. 잠시 후. 집 마당에서 여러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웅성거림은 시간이 갈수록 가까이 들렸고 그냥 무시한 채 시간을 보내기에는 태석의 호기심이 너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무당 어머니를 둔 태석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굿판 구경을 못한 터였기 때문이다. 자세를 고쳐 앉은 태석은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둥그렇게 진을 친 무리 속으로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한복을 차려입고 머리에는 옛날 궁궐의 병사들이 썼을 법한 야릇한 모자까지 쓴 채였다. 가운데쯤 앉아있던 북 치는 사람이 소리를 울리자 굿판이 시작되었다. 작게 입을 오물거리며 주문을 외우는가 싶더니 어쩔 때는 뛰고 어쩔 때는 춤을 추기 시작했고 태석은 그 모습이 너무나 생소하고 너무나 신기해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금 사람들의 무리에서 춤을 추는 무당은 태석의 어머니가 아니라 새로운 신딸의 어머니였다. 신딸의 초점 잃은 눈이 어쩐지 소름 돋게 했지만 그보다 더한 신비함이 태석을 꼼짝 못하게 했다.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도 신기[神氣] 영험[靈驗]한 무당을 어쩌진 못했고 그 무당은 뜨거움 속에서도 한참을 더 신명나게 뛰었다. 분위기는 점차 고조되었고 그 고조됨이 극도에 달하자 사람들은 허리 숙여 무당을 떠받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모든 순서가 끝난 것처럼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주위를 '휙'하고 둘러보았고 그 신호를 받은 한 여인이 마당 한 쪽에 놓여있던 작두를 모두가 잘 보이는 가운데로 가져왔다. 그 서슬 퍼런 작두가 모습을 보이자 주위의 모두는 숨을 죽였다. 그 모습을 내려보던 태석도 숨을 죽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태석의 어머니가 작고 고운 맨발을 드러내었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자 몇 몇 사람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동안 수없이 올랐을 어머니도 긴장되는지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을 마당에 떨궜다. 그와 동시에 퍼런 작두 날이 뜨거운 햇볕을 반사시켰고 그 빛은 태석에게로 곧장 날아와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잠깐이지만 길게 느껴지는 침묵. 매일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들도 그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작고 고운 맨발이 작두 위로 올라섰다. 두 팔을 벌리고 보란 듯이 작두 위에 멈춰 선 태석의 어머니. 태석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고 걱정스런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오우...!!' 사람들의 낮은 탄성이 태석에게도 들렸다. 안도의 소리로 느낀 태석은 그때서야 감고 있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지금 태석의 눈에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어머니가 똑바로 보였다. 한 걸음. 그리고 다시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태석은 조바심보다는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줄기 빛이 태석의 눈을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고 그것은 좀 전의 퍼런 작두 날이었다. 갑자기 나쁜 기운이 느껴졌고 태석은 손을 들어 그 빛을 막았다. 그때였다. "아악!!!" 젊은 여자의 소름끼치는 비명. 태석은 급하게 그곳을 바라보았다. "어...어...!!"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태석. 그의 눈에 작두 옆으로 쓰러져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어...어...!" 낮은 비탈길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내려가 마당 앞으로 들어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고 태석은 멍한 표정으로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 서슬 퍼런 작두 위에 방울진 피가 태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서웠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쓰러져있는 어머니가 우선 이었다. "어...엄...!" 차마 '엄마'소리는 하지 못하고 급하게 몸을 부축했다. "이눔...! 안 나가구 집에 있던 겨?" 발바닥은 뻘건 피로 흥건했고 그 피가 맨땅으로 흐르고있는데도 태석을 보며 웃어주었다. "괜찮은 거유...?" "그려... 이 에미는 괜찮은 겨..." 상처를 보니 그리 깊지 않았고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 꿈에 큰무당 님이 보이더니... 이 에미도 이제 신기[神氣]가 다 된 모양인 겨..." 아직까지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병원 가야겄유." "냅둬... 이눔아! 무당이 무신 병원인 겨? 살짝 베인 것 뿐잉께... 집에서 약이나 바르면 되는 겨... 그나저나 이제는 어찌 먹고 산다냐..." 어머니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작두에서 떨어진 무당은 더 이상 영험[靈驗]할 수 없었고 더 이상 굿 따위를 부탁하는 일도 없을 것이리라. "태석아...! 이럴 때는 사람들을 물려야 하는 겨..."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그 얘기를 듣고는 뿔뿔이 자리를 벗어났다. 물론 내림굿을 받으려던 신딸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몸종처럼 따르던 계집아이만이 남아서 주변을 정리했고 태석은 어머니를 방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한달 동안을 어머니는 두문불출이었다. 말 그대로 방에서 대소변을 받을 만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작두에 베인 상처가 덧나거나 악화 되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말대로 기[氣]가 빠진 사람처럼 꼼짝도 못했다. 그렇게 여름은 지나가고 태석의 여름방학도 거의 끝나갈 무렵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태석을 불러 이렇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태석아...!" 아직도 여름인데 어머니는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있었다. 가벼운 홑이불로 갈아드리려 했어도 추위가 심하다며 한사코 솜이불을 고집했다. "이눔아...!" 태석은 여전히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자꾸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넌 에미한테 버림받았던 것이 아닌 겨..." 20년만의 만남에도 이제껏 아무 말이 없던 어머니가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에미는 무당인 겨... 그러니 네 눔도 무당의 아들인 겨... 그게 다 팔자인 겨... 그래서 그랬던 것인 겨..." "누가 그런 소리 듣고 싶대유?" "니 눔도 알다시피 이 에미가 오래 못 살겨... 그전에 일러두고 싶은 게 있는 겨. 이 에미가... 조금이라도 기운이 있을 때 얘기해야 할 거 같은 겨... 알겄냐?" 태석이 대답이 없자 어머니는 길게 한숨을 드리우며 나머지 얘기를 이어갔다. "만약에 이 에미가... 올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더라도..." "아따! 그딴 소리 그만 하라니께유!" "이눔아! 그래도 꼭 들어야 하는 겨!" 역정을 내던 어머니가 기운이 벅찼는지 몇 번 마른기침을 했다. "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사실인디... 그래야 하는디... 혹시라도 니눔이 천륜을 어기는 행동을 할까봐서... 야그하는 것이니께... 꼭 새겨들어야 할 것이여. 알아 듣겄냐?"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진지한 눈빛을 보니 다시 가슴이 뭉클해졌고 태석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절대로 강 부자 댁으로는 걸음도 옮기지 말아야 할 것이여... 그 집 자손들하고는 어떤 인연도 만들지 말어야 할 것이여...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여... 절대로..." 어머니가 말하는 강 부자는 민수의 아버님이었고 자손들이라 함은 강민수와 강민주를 일컫는 말이라는 건 쉽게 짐작했지만 이유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리구... 내 얼마 전까지 미처 몰랐는디... 윤 씨가 딸년이랑 다시 여기에 왔담서...?" 태석이 모르는 표정을 보이자 어머니는 거기에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벙어리 윤 씨 말이여... 그 딸년이 니눔보다 한 살이 많은 것인디... 지 에미를 닮았으면 꽤나 이쁠 것이고..." "아...! 이지 말하는 거유?" "그려 그려... 지 에미 이름하고 같을 것이여... 알고 있는 것이여?" "갸두 지하고 같은 반이유."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길게 한숨을 드리웠고 그 정도는 아까보다 훨씬 심했다. 그리고는 한참을 생각했고 다시 말을 잇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려... 그랬던 겨... 그랴서 큰무당이 자꾸 꿈에 뵈였던 겨..." "이상한 소리 할거면 그냥 주무셔유..." "이눔!!" 걱정 돼서 한 소리에 어머니는 다시 역정을 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할지도 모른단 말이여..." "그류... 알았응께..." 태석은 물 적신 수건으로 어머니의 이마를 닦아 드렸다. "니 혹시... 이지라는 기집애하구 친한 겨?" "야? 무슨 말이래유?" "니 얼굴에 누구를 좋아하는 표정이 보이더니... 혹시 그 기집은 아니겄제...?" "긍께... 뭔 말이냐구유?" "혹시라도 그 기집하고는 절대 가까이 해서 안 되는 겨... 이 말은 꼭 명심해야 하는 겨..."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무조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 하니 태석은 괜하게 짜증이 났다. 하지만 어머니는 병중이라 함부로 표현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절대... 강 부자 댁하구 윤 씨 딸년하고는 어떤 인연도 맺으면 안 되는 겨... 그리고... 이 에미가 죽으면... 무조건 이 동네를 뜨는 겨... 이 에미가 물려줄 것은 없는디... 그래도 몇 마지기 안 되는 논하구 밭뙈기 팔면 니 한 몸 당분간 살아갈 처지는 될 껴... 알겄냐? 알아 듣겄지?" "뭔 일인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유? 왜 자꾸 안 좋은 소리만 하는 것이유? 그리구 엄니가 죽기는 왜 죽어유?" 태석은 자기도 모르게 '엄니'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니 생전 처음 해보는 말이었다. 친구 어머니가 아닌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한테. "니눔이... 드디어 에미한테 엄니라고 한 겨..." 갑작스레 눈물을 쏟는 어머니. 그렇게 '엄니'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일까? "강 부자 댁한테 무슨 죄라도 지은 거유? 왜 자꾸 그 집하고 연관지어서 야그한대유? 그리구 이지는 무슨 소리유? 속 시원하게 야그 좀 해봐유!?" "이눔아! 이 에미는 평생 죄지은 것이라고는 니눔 내 뱃속으로 낳은 죄밖에 없는 것이여.!" 방안의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어머니의 얘기를 들은 태석은 무엇보다 큰 슬픔이 밀려들었고 '아차'싶은 어머니는 고개를 돌렸다. "날 낳은 게... 죄였유...?" 태석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었고 어머니는 고개를 돌린 채 눈물만 흘렸다. "날 낳은 게... 죄유...!?" "그려 이눔아...!" 기어코 몸을 세워 벽에 기댄 어머니. 무슨 큰 결심이라도 선 듯 결연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이제 와서 더 이상 뭘 숨기겄냐..." "그류... 다 말해봐유...! 뭐 땜시 20년이나 내쳤다가... 지금에 와서는 왜 다 안 된다고만 하는 것인지... 속 시원히 말해보란 말유!" "그려! 말할 것잉께... 다 말할 것여! 더 이상 죄를 만들지 말아야할 것이여!" 어머니는 굳은 결심을 한 듯 주전자에 있던 물을 단숨에 비웠다. 태석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잘 들어야 할 것이여... 그리고 이 사실은 너만 알고 있어야 할 것이여... 절대 이 에미 말을 믿어야 할 것이고... 절대 이 에미 말을 따라야 할 것이여..." "알았응께..." "강 부자 두 아이들허구... 니눔하구... 거기다가 윤 씨 딸년하구는... 모두 한 씨여... 한 씨란 말이여...!" "한 씨...!?" "그려... 한 씨! 배만 달랐지 씨는 다 강 부자의 씨여..." 어머니가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울기 시작하는 동안 태석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허공만을 응시했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한 씨...!' 그렇게 계속해서 되뇌고 있으니 허무한 웃음이 저절로 나왔고 그 허무함은 끝없는 분노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울음을 멈춘 어머니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나간 옛일을 꺼냈는데 그 얘기들은 이러했다. 장항에서 가장 큰 만석지기인 강 씨 집안은 대대로 손[孫]이 귀한 터라 강민수의 아버지도 5대 독자였단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일찍 자손을 봐야했고 결혼도 일찍 했는데 쉽게 자손이 생기지 않았었다고 한다. 세월은 자꾸 흐르고 쉽게 자손이 생기지 않자 조급한 마음에 유명한 점쟁이를 찾았고 그 점쟁이의 해결책은 강민수의 아버지가 신기[神氣]가 영험[靈驗]한 무당과 합궁[合宮]을 해서 그 무당이 아들을 생산해야 본처와의 사이에 자손을 생산할 수 있다고 했었단다. 엄격한 유교집안인 강 씨 집안은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자손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결단을 내렸고 그 당시 서천과 장항에서 가장 영험한 신기를 가졌던 무당과 합궁을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윤이지였고, 무당과의 합궁에서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강 씨는 윤이지의 어머니인 큰무당의 새로운 신딸. 즉, 태석의 어머니와 합궁을 해서 태석을 있게 했다는 얘기였다. 우연인지 아니면 그 점쟁이의 말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다음 해에 본처와의 사이에 강민수가 태어났고 얼마 안 있어서 강민주도 태어나게 되었다는 말을 끝으로 태석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까지 들은 태석은 놀라움과 분노로 뒤범벅이 되어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더니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그리고는 동산의 소나무로 달려가 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일주일 뒤. 태석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사인[死因]은 작두에 베인 상처의 후유증도, 그렇다고 다른 지병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넋을 잃은 사람처럼 힘없이 죽어갔다. 태석의 어머니는 무슨 이유에선지 죽는 그날까지 병원을 외면했고 무당의 운명이라며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운명을 달리하는 어머니를 끝까지 지켰던 태석의 마음은 더 아프기만 했다. 상[喪]을 마친 태석은 어머니를 동산의 소나무 아래에다 모셨다. 주위 사람들은 화장을 해야한다며 끝까지 권유했지만 태석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어머니께서도 화장을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건만 짧기만 했던 당신과의 추억을 한줌 먼지로 날려보낼 수가 없기에 유언을 무시한 채 소나무 아래에 정성스레 묻어 드렸다. 조문을 왔던 몇 몇의 이웃들도 모두 돌아가고 태석 혼자만 무덤에 남았다. 그리고 그간 참았던 눈물을 원 없이 쏟기 시작했다. '엄니...!!' 사무치는 후회는 다른 어떤 말도 만들지 못했고 그냥 그렇게 목놓아 울며 어머니를 불렀다. '그류... 다른 건 다 무시해도... 마지막에 엄니가 남겼던 말은 꼭 지킬 것이구먼유... 그깟 아부지는 첨부터 없던 것이지유... 그리구 조금 좋아했었던... 그깟 가시나 하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믄 되는 것이쥬...' 속으로는 이렇게 되뇌는 태석도 갑자기 밀려드는 윤이지에 대한 그리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감정들을 외면하려 해도 그럴수록 가슴 한구석이 더 크게 아려왔다. '무당인 엄니나... 그 아들놈인 지나... 참 엿 같은 운명이네유... 뭐 이런 게 다 있대유...?' 곱게 덮인 어머니의 무덤위로 한 방울 한 방울씩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덤을 끌어안고 서럽게 울고있는 태석의 등뒤를 성일이 말없이 지켜주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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