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점자블록, 겨우 따라가니 벽… 시각장애인 버스귀성 ‘아득’ 다이애나정 | 2019.09.12 | 조회 365 | 추천 1 댓글 0
서울 버스터미널, 장애인 배려 외면
점자블록, 아예 없거나… 덮여있거나… 막다른 벽 버스터미널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은 모습. 서울 남부터미널 매표소 앞에는 점자블록이 설치돼 있지 않고(위쪽 사진), 터미널 건물 출입구 근처의 점자블록은 카펫으로 덮여 있다(왼쪽 아래 사진). 서울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매표소 앞에 설치된 점자블록을 따라가다 보면 막다른 벽에 이른다. 고도예 yea@donga.com·김재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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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고속버스터미널. 건물 안으로 들어선 김훈 씨(47)가 갑자기 멈춰 섰다. 김 씨는 오른손에 든 하얀 지팡이로 건물 바닥 이곳저곳을 한참 동안 두드렸다. “여기가 도대체 어딥니까. 알 수가 없네요.” 김 씨는 당황스러워했다. 기자가 시각장애 1급인 김 씨와 함께 고속버스터미널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김 씨가 갑자기 멈춰 선 뒤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한 건 터미널 안에 시각장애인용 점자블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김 씨는 건물 바닥에 깔린 노란색 점자 블록을 지팡이로 두드리며 길을 찾는다. 김 씨는 지하철 역사 안에선 점자블록을 두드리면서 이동했다. 그런데 버스터미널 건물로 들어선 순간 점자블록이 사라진 것이다.
김 씨는 “시각장애인에게 길을 알려주는 음성 유도기가 설치돼 있을 수 있다”며 무선 리모컨을 꺼냈다. 하지만 김 씨의 기대와 달리 리모컨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터미널 안에는 음성 유도기가 없었다. 김 씨가 도움을 청할 안내원도 없었다.
12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지만 시각장애인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혼자 힘으로 승차권을 구입하고 버스로 귀성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 서울 버스터미널 점자블록 ‘엉망’
본보는 10일 서울의 버스터미널 3곳을 둘러봤다. 이 중 터미널 건물 입구에서부터 매표소, 버스 승차장까지 점자블록으로 연결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건물은 터미널 출입문 앞에만 점자블록이 있었다. 매표소는 출입구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매표소 앞에도 10m 길이 점자블록이 있었다. 하지만 건물 출입구부터 매표소까지 점자블록으로 연결돼 있지 않아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매표소를 찾기는 어려웠다.
서초구 남부터미널에는 점자블록이 엉뚱하게 설치돼 있었다. 기자가 건물 출입구에서부터 점자블록을 따라가 보니 매표소가 아닌 호남 방면 버스 승강장이 나왔다. 점자블록 곳곳은 붉은 카펫으로 덮여 있어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를 짚고 길을 찾기 어려웠다. 고속버스터미널 호남선 건물에는 점자블록이 없었다.
2005년 이후 새로 만들어지거나 개조된 고속버스터미널엔 반드시 점자블록이 있어야 한다. 2005년 1월 제정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엔 이런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본보가 둘러본 터미널 중 2곳은 법조항을 지키지 않았다. 2005년 이전에 준공된 나머지 한 곳에도 점자블록은 없었다. ○ “기차표 못 구하면 귀성 포기해요”
시각장애인들은 기차표를 구하지 못하면 대중교통으로는 고향에 가기 힘들다고 호소한다. 고속철도(KTX) 역사에는 점자블록이 깔려 있고 음성 유도기도 있다. 하지만 연휴 기간엔 기차표 예매 경쟁이 치열하다. 서울시가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운영하는 콜택시는 서울과 경기의 일부 지역만 오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명절 연휴에 귀성을 포기하는 시각장애인들도 있다. 기차표를 예매하지 못한 시각장애인 김모 씨(40)는 올 추석에 고향에 가는 걸 포기했다. 10년 전부터 서울 구로구에서 혼자 살고 있는 김 씨의 고향은 충북 제천이다. 김 씨는 지난해 추석엔 직장 동료의 차량을 얻어 타고 고향에 갔었다. 하지만 직장 동료는 “올해는 가족과 해외여행을 가게 됐다”고 알려왔다. 홍서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연구원은 “고속버스터미널에 점자블록을 설치하지 않은 건 명백한 장애인 차별이고 현행법 위반”이라며 “정부가 전국 버스터미널의 시각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현황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