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레 살고 철 따라 먹기
우리 동네에는 오일장이 선다. 그날 나가야 생선 한 토막, 과일 한 알이라도 살만 하다. 장에 나가면 과일가게 아저씨가 눈인사를 한다. 서울에 살 때는 과일을 좋아해서 늘 먹었다. 밥 먹고 나면 으레 과일 한 조각을 먹는 건 줄 알았다. 그 버릇이 남아 있어 처음 몇 해 동안엔 과일을 사다 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일 가게를 그냥 지나간다.
먹을거리 가운데 과일처럼 사람을 유혹하는 게 있을까? 남의 집 콩이 잘 여물면 덕담거리지만, 남의 집 담 밖으로 나온 앵두는 한 두알 따먹는 게 사람 아닌가. 그런 과일이 가게에 넘쳐난다. '조기재배' 수박과 참외, '저온저장' 사과, 바다 건너 온 바나나와 오렌지……. 5월이면 날이 더워지니 수박이 시원하니 좋겠지. 그렇지만 수박을 길러 보니 장에 나온 철 이른 수박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양앵두
딸기
5월은 여름작물들이 자리 잡고 자라기 시작할 때다. 수박은 모종 가운데 가장 늦게 5월 중순 소만 무렵, 본밭에 옮긴다. 그러니 수박은 이제 겨우 본잎이 나오기 시작해 덩굴이 아직 뻗지도 않은 어린이 단계다. 비닐집에서 모종을 키워서 그렇다. 이 수박이 자라 넝쿨을 뻗고 암꽃 피고 열매를 맺어 익는 건 빨라도 초복이 지나서이고, 중복 무렵이 되어야 한창이다. 이렇듯 수박은 한여름 땀을 충분히 흘리고 난 다음 먹는 과일이다. 토마토도 참외도 그렇다.
과일나무는 4월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 5월까지 꽃을 피운다. 그러니 봄은 과일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 때 시장에 과일이 넘쳐나고, 그동안 그걸 좋다고 사서 먹고 살았으니 철모르고 산 셈이다. 내 몸 움직여 농사를 지으면서 '철' 없음을 실감한다. 봄에 과연 입맛이 없는가? 봄나물을 날마다 실컷 먹으니 입맛이 없는 날이 없고, 싱싱한 봄 푸성귀를 골고루 먹으니 밥상에 싱싱함이 가득하다. 아이들도 찔레순 꺾어 먹고, 수영 잎 뜯어 씹으며 잘 자란다. 과일 생각이 나면 아이들과 딸기밭을 가꾸고, 과일나무 아래 오줌이라도 눈다.
5월 중순이 되면 딸기가 하나하나 익어가고, 뒤이어 올 앵두가 빨갛게 익는다. 딸기가 익으면 아이들은 날마다 딸기밭에 가 엉덩이를 들고 딸기 덩굴 사이에서 빨간 딸기를 찾는다. 딸기를 따 먹고, 밭에서 일하는 우리한테 달려와 입에 넣어 주고. 앵두가 익으면 나무를 타가며 앵두를 따 먹는다. 새콤하고 산뜻한 앵두.
바로 이 맛을 보려 이제껏 기다렸지. 나물은 어른이 부지런히 해다 아이에게 주지만, 딸기와 앵두는 아이들이 부지런히 따다 우리에게 준다. 이렇게 앵두와 딸기로 입가심을 하노라면 어느새 6월이 다가오고, 뽕나무에 오디가 까맣게 익으면 그때부터 과일이 꼬리를 물고 나온다. 농사하는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다 이 세상이 얼마나 철없이 돌아가는지로 이어졌다.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요, 도시 사는 친구들한테 유기농산물 찾기보다 제철을 찾으라고 말해요."
질경이
• 질경이
질경이는 마차 바퀴가 다니는 길에서도 살아남는 질긴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 집은 논둑, 마당과 비닐집 드나드는 길목에서 질경이가 자란다. 또 집 뒤란 그늘 진 곳에서 도 살고, 봇도랑 물이 찬 곳에도 있다. 한마디로 어디서나 살아가는 생명력이 질긴 풀이다. 질경이는 또 초봄부터 늦여름까지 줄줄이 싹이 오른다. 한쪽에서는 씨가 맺히는데 그 곁에 새로 돋아난 질경이 싹을 볼 수 있다. 질경이 가운데 아직 꽃대가 올라오지 않고 부드러운 질경이는 밑동에서 도려내 먹는다. 살짝 데쳐 나물로 무쳐 먹어도 되고 된장국을 끓여도 된다. 많이 할 수 있으면 데쳐서 묵나물을 만들었다가 먹어도 좋고, 효소차를 담가도 좋다.
왕고들빼기
• 왕고들빼기
이른 봄에 씨를 뿌려 봄 내내 먹던 상추가 시들해질 무렵이 되면 왕고들빼기가 지천이다. 왕고들빼기는 국화과 한해 내지 두해살이풀이다. 어릴 때 뿌리째 캐내어 김치를 담가 먹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상추처럼 쌈을 싸서 먹는다. 이파리를 꺾으면 하얀 진이 흘러나오고 쌉싸래한 맛이 강하다. 고기 구워 쌈 싸 먹으면 잘 어울린다.
방아
• 방아(배초향)
동네 골목에서 자라는 방아. 방아는 배초향이라고도 하는데, 꿀풀과 여러해살이풀로 습진 데를 좋아한다. 우리 동네는 이 방아를 집안에 심으면 방아다리 신세인 거지가 된다고 울타리 밖이나 길목에다 심는다. 웬만한 풀은 풀약으로 싸그리 잡아도 방아만은 살려둔다. 방아 잎이 향신료로 좋기 때문이다. 민물고기 음식을 만들 때 비린내를 잡아 준다.
달개비
• 달개비(닭의장풀)
산야초 가운데 약이 아닌 것은 없다. 나는 달개비를 약으로 기억한다. 신혼 시절 살던 동네 뒷산에 약수터가 있었는데, 거기 할머니들이 약이라며 열심히 뜯던 기억이 나서다. 달개비는 한해살이풀로 봄비 오고 난 뒤 싹이 난다. 싹이 보이면 몇 개 뽑아다 샐러드에 넣어 먹곤 한다. 연한 싹은 날로 먹어도 좋다.
명아주
• 명아주
명아주 역시 살짝 데쳐 말려 묵나물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한해살이풀로 봄이 아닌 초여름에 많이 나는 나물이다. 큰애가 명아주를 길러 지팡이를 만든 적이 있는데, 그때 보니 명아주는 사람 키만큼 자라며 한 포기에 씨가 엄청 달리더라. 그러니 밭에 있으면 나물이 아닌 풀로 보여 뽑아낼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밭이 명아주 밭이 된다. 어리고 살진 싹을 뜯어다 살짝 데쳐 나물로 무쳐 먹는다.
죽순
•죽순
날이 더워지면 대나무에서 새순이 올라온다. 대나무는 이름은 나무이지만 사실은 다년생 풀에 더 가깝다. 죽순은 비가 온 뒤 더 잘 올라오는데 아무래도 대나무가 우거진 곳보다는 양지바른 대나무 숲 둘레에 많다. 대나무가 잘 되는 남쪽에는 4월부터 죽순이 올라오고 죽순도 굵고 튼실하다. 우리 동네는 추운 곳이라 늦게 올라오는데 그때가 봄가뭄과 겹치기 쉽다. 그러니 죽순이 귀하고 가늘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대나무밭에서 올라오는 죽순을 발로 툭 차 쓰러뜨린 다음 지표보다 아래 있는 밑동을 꺾어 든다. 집으로 돌아와 죽순의 껍질을 벗기는데 칼로 위에서 아래로 슥 훑어주면 껍질만 싹 벗겨진다. 껍질을 벗긴 죽순을 방망이로 살살 두드리면 죽순이 자기 결대로 갈라진다. 이때 부드럽지 않고 푸른빛을 띤 부분은 독이 있다.
죽순을 위에 얹고 밥을 하는 죽순밥도 향기롭다. 껍질을 벗긴 죽순을 쌀뜨물에 삶아 아린 맛을 없앤 뒤, 나물로 무쳐도 되고 냉동실에 얼렸다가 또는 묵나물로 말렸다가 먹어도 좋다. 된장국이나 카레, 토마토 찌개(스튜)에 넣으면 씹는 맛이 좋고 한창 제철인 마늘종, 양파, 표고버섯과 함께 야채볶음을 해도 좋다.
칼로 위에서 아래로 쭉 훑어 껍질을 벗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