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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이슈 | ||||||||
크리스마스 유래 happykingdoom1004 | 2021.12.24 | 조회 1,408 | 추천 0 댓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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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기념일.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의 의미. <x-MAS>라고 쓰는 경우는 X는 그리스어의 그리스도(크리스토스) XPIΣTOΣ의 첫 글자를 이용한 방법이다. 프랑스에서는 노엘(Noël), 이탈리아에서는 나탈레(Natale),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텐(Weihnachten)이라고 한다. 또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데이>, 그 전야를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한다. 기원크리스마스는 아기예수 탄생을 기리는 날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린 이탈리아 화가 Guido Reni의 작품 <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 Guido Reni 『신약성서』에는 마리아의 처녀 회임으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 교도는 1월 1일, 1월 6일, 3월 27일 등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였는데, 교회로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는 않았다. 3세기의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크리스마스를 정하는 것은 이교적이라고 비난하였다.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로 고정되고, 본격적으로 축하하게 된 것은 교황 율리우스 1세(재위 337~352)때이며, 동세기 말에는 그리스도교 국가 전체에서 이날에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게 되었다. 오랜 논의끝에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로 고정된 것은 초기 교회 교부들의 체험과 영지에 의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에 큰 축제를 행하는 것은 고대 시대의 사회의 습관이었다. 그중에서도 요람기의 그리스도 교회가 개종을 원하였던 로마인이나 게르만인 사이에는 동지 제사가 성대하게 행하여졌는데 창고에는 수확된 곡물이 가득 차 있다. 목초가 부족한 겨울을 대비해서 도살한 가축의 고기도 충분히 저장되어 있다. 1년의 힘든 노동에서 해방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이 시기, 사람들은 이어서 찾아올 식량부족을 잊고, 먹고 마시는 성대한 축제를 행하였다. 생명의 은혜를 준 태양의 힘을 약화시키고, 겨울을 가져올 자연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공물을 바치고, 풍작ㆍ풍요를 기원해서 불을 피웠다. 온 세상의 초목이 메마를 때 푸르름을 유지하는 상록수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서 장식되었다. 게르만인의 동지의 축제 율에 대해서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로마인의 동지의 축제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문학ㆍ회화ㆍ조각 등에 남아 있는데 12월 25일은 로마의 동지로 그날은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으로서 3~4세기의 로마에 보급된 미트라스교의 중요한 제일이었다. 사투르날리아(농경신의 날)을 표현한 조각가 Ernesto Biondi의 1909년 작품. Buenos Aires Botanical Gardens에 소장ⓒ Roberto Fiadone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는 사투르날리아라고 불리는 농경신 사투르누스의 제사가 행하여졌다. 이 기간에는 집집마다 밝게 불이 켜지고, 상록수가 장식되었으며 선물이 교환되고 남자들은 여자의 의복이나 동물가죽 등을 두르고, 보통은 금지되어 있던 행위가 행하여졌는데 주인과 노예가 자리를 교환하는 소동도 행하여졌다. 이와 같은 로마의 사투르날리아와 게르만의 율 축제의 시기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로서 선택되었다. 교회는 기존의 제일을 가능한 한 이용할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트라스교는 그리스도교의 강적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보다 앞서 유사점이 많은 미트라스교와의 습합을 고려, 321년에는 매주 휴일을 <태양의 날(dies solis=sun day)>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크리스마스에 대해서도 교회의 동일한 방침을 볼 수 있다. 그위에 당시 그리스도 교도 사이에도 예수를 이 세상의 빛, 태양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다.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우리 주 예수가 탄생한 이 성스러운 날을 "태양의 탄생일"이라고 부르자>라고 하였는데 크리스마스가 언제부터 축하되었는지는 불명하다. 초기 동방교회의 사람들은 공현제를 그리스도 세례의 날, 신성 현시의 날로서 축하하였다. 그들은 아리우스파 사람들로, 예수의 세례를 중시하고, 탄생에는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탄생 때부터 예수의 신성을 믿는 정통파 그리스도 교도는 그들을 이단으로 생각했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의 이단선고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서방교회가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정한 것은 이단과의 구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로마에서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에 축하된 것은 336년 이전이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데 이 날이 결정되기까지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즉, 12월 말, 예수가 태어난 팔레스타인 지방은 우기에 해당하며, 양은 들로 나가지 못한다. 이 시기에 인구 조사가 행하여졌다는 증거는 없다. 학자들은 별도의 근거에서 크리스마스를 추정하려고 하였는데, 어떤 견해도 충분히 설득적이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크리스마스는 고정되었다. 수세기동안 이교의 습관은 강하게 남아 있으며, 교회는 이를 염려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교의와 명확히 모순되지 않는 한 이를 근절하지 않고, 동화ㆍ습합의 방침을 취했다. 다음에 영국을 예로서 오늘날에 이르는 크리스마스의 변천을 조감해보자. 중세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영국 전도를 개시했을 때, 크리스마스는 로마교회의 3대 축일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이듬해 크리스마스에 1만명 이상의 앵글로 색슨인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약 1세기 후, 베다는 이 날이 원래 <어머니들의 밤>이라고 불리며, 어머니인 여신의 축일이었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개종해도 관대한 교회의 자비에 의해서 죄없는 이교의 축제를 즐겼던 것이다. 그들은 상록수로 장식하고 율의 통나무를 태우고, 가면극이나 주술적인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이와 같이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율과 탄생절의 습합으로서 성립하고, 앵글로 색슨력은 이날부터 신년을 기산하게 되었다. 이런 관습은 중세 말까지 남아 있었다. 알프레드 대왕은 크리스마스에서 공현제까지를 성스러운 기간으로 정하고, 노동을 금하였는데 왕이 878년 데인에게 일시적으로 패배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위의 기간이 성스러운 기간으로 정해진 것은 567년의 투르(Tours) 공의회에서이다. 앵글로 색슨인의 그리스도교화는 데인인의 침략에 의해서 지체하거나 후퇴하였는데, <노르망 콘퀘스트>까지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크리스마스>라는 용어는 『앵글로 색슨 연대기』의 1043년의 항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전에는 <동지제> 또는 탄생을 의미하는 <nativity>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종교개혁 이후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에도 크리스마스는 잉글랜드 교회의 3대축일의 하나로서 축하되었다. 당시의 문학작품 등에 의하면 크리스마스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시간, 진정한 기쁨의 시간, 친구ㆍ친척과 정을 돈독히 하고, 가난한 이웃을 환대하는 시간이었다. 이 시대는 궁정생활의 화려함에 비해서 지방에서는 빈부의 차가 심화되어 과거의 인간관계가 붕괴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크리스마스는 가난한 이웃을 환대하라는 문구가 저술가들에게 특히 강조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는 고향사람들을 환대하도록 크리스마스에는 신하들을 귀성시켰다. 지방자치체는 귀족ㆍ젠틀리에게 이 환대를 의무지웠는데 특히 흉작일 때는 그것이 지방의 치안유지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1627년의 크리스마스에 추밀원은 런던 주교에게 영국에 망명해온 프랑스의 신교도 구제를 위해서 주교구 전체에서 기부금을 모으도록 명령하고, 크리스마스 정신을 간청했다. 퓨리탄 혁명시대왕당파와 영국 교회는 즐거운 전통적 습관을 상징하는 날로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그러나 근엄한 퓨리탄은 이 날을 로마 가톨릭의 축일로서 비난하고, 폭음폭식, 댄스, 도박, 대소동 등 악으로 연결되는 축제로서 공격했다. 이미 『제약의 해부』(1583)의 저자 P. 스터브스는 극장ㆍ연극을 비방하고, 가면극을 가장해서 도둑, 매음, 살인 등이 크리스마스처럼 횡행하는 시기는 없다고 기술하였다. 17세기의 어느 퓨리탄은 <크리스마스는 주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바쿠스신의 축제이다. 이교도는 이를 보고 예수는 탐식한 향락주의자, 음주가, 악마의 친구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다. 온건파는 지나친 행동을 시정하는데 그쳤다. 장기의회도 크리스마스에 간섭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1644년, 그들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교회의 압력에 의해서 태도결정이 강요되었다. 장로파는 1583년, 스코틀랜드에서 크리스마스를 완전히 금지하였다. 그후 왕의 명령으로 한때 부활하였지만, 다시 크리스마스를 금지하였다. 의회파의 지도자들은 장로파의 크리스마스 금지요구를 잉글랜드에서 실시할 것을 거부하였지만 곧 굴복하였는데 그것은 의회파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만 효과를 거두었다. 1647년, 의회파는 크리스마스 금지법안을 가결하고자 하였다. 이때 이에 반대하는 폭동이 각지에서 일어나 마침내 가정에서의 크리스마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정복고(1660) 이후크리스마스는 다시 교회의 3대 축일의 하나가 되고, 사람들은 이를 자유롭게 축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상의 변화는 과거에 시골의 지주저택에서 확산된 전통적 크리스마스의 모양을 바꾸어서, 소박한 사람들의 소동도 폐지하고, 종교심도 희박해지게 되었다. 이 변화는 천천히, 불균등하게 진행하였다. 크리스마스 휴일이 제정되고, 대학, 학교, 재판소, 의회는 크리스마스에서 공현제까지를 휴일로 하고, 관공청은 이 기간의 일수를, 다망한 부서는 그 일부를 휴일로 하였으며 일부 사람들은 성촉제(2월 2일)까지를 크리스마스로 생각했다. 19세기에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노동조건이 매우 가혹해져 크리스마스 휴일은 당일만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부유한 가정에서는 화려하게 축하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이를 축하할 비용이 없는 사람들이 증대하여, 크리스마스는 결국 사멸할 것으로 보였다. 빅토리아 시대19세기 중엽, 크리스마스가 부활하였다. 그것은 처치스트운동의 시대로, 대영제국의 위광이 가장 확대된 시기였다. 새로운 크리스마스에서는 이웃사랑, 자선이 중시되고, 종교심의 부활에 의한 종교적 측면의 보정이 행하여지고, 그 위에 과거의 화려한 축제의 관습이 빛을 더했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축제가 된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크리스마스 트리,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 카드가 도입되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부활하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크리스마스 정찬(디너)이 서민 가정에 진출하였는데 오늘날의 크리스마스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새로운 크리스마스의 성립에 크게 기여한 것은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과 C. 디킨스이다. 앨버트 공은 독일에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습관을 윈저 성의 가정 크리스마스에 도입하고,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몇 가지 문학작품을 공간하여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전하고, 동시에 크리스마스의 존재모습, 물질적 즐거움을 향유하기 위해서 수행해야 할 자선 등의 의무를 가르쳤다. 새로운 크리스마스는 급속히 침투하여, 공론가나 반대론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비국교도도 어린이들이 친구들의 즐거움의 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예배당의 일부는 회원이 국교회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 것을 보고 크리스마스 예배를 개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비국교도의 태도도 연화하여, 영국국민이 새로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게 되었다. 이런 추세에 의해서 단축된 크리스마스 휴일도 복싱 데이(Boxing Day, 크리스마스의 다음날로 이 날에 사용인이나 우편배달부 등에게 축하 선물을 준다)까지 연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은행, 관청만이 아니라 19세기 말까지는 일반 상공업 종사자에게도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모두가 함께 축하하는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성립된 것이다. 음악그리스도교 성절로서의 크리스마스는 연간의 교회력을 통해서 가장 풍요로운 음악으로 장식된다. 민중적인 크리스마스 음악은 옛날부터 캐럴(carol)로서 친숙해져 있다. 북구제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음악은 주로 실내에서 개최되는데, 남구제국에서는 옥외에 성모자상을 나타내는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을 향해서 음악을 바치는 풍습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남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서정적 음악 시칠리아노(siciliano)는 그 전형적인 예로, 바로크 시대를 통해서 작곡된 수많은 크리스마스 협주곡에는 반드시 시칠리아노의 악장이 포함되어 있다. 헨델의 <메시아>의 탄생 장면에 나타나는 <피파>도 그 일례이며 프랑스에서는 노엘의 선율에 의한 미사곡이나 오르간 변주곡 등도 수없이 작곡되었다. 교회 내부에서 성절로서의 크리스마스 의식은 12월 24일 저녁 예배부터 시작된다. 거기에서 음악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마니피카트로, 팔레스트리나나 바하에게 명작이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12월 25일 오전 0시부터 제1미사, 제2미사, 제3미사 등 세가지 미사를 드린다. 이들 미사는 그레고리오 성가로 노래되는 경우도 있지만, 특히 심야 미사는 캐럴이나 노엘의 선율을 아로새겨서 민중적인 기쁨 중에 집행되는 경우가 많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도 심야의 예배외에 크리스마스 시즌을 통해서 특별하게 작곡된 작품이나 찬미가, 오르간곡이 연주된다. 특히 유명한 것은 장대한 규모를 가진 바하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이다. 크리스마스 음악에는 르네상스 중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곡이 많다. 비교적 새로운 작품으로 전세계에서 애창되고 있는 것은 19세기의 F.X. 그루버 작곡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다. 또한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징글벨>ㆍ<화이트 크리스마스> 등이 널리 애창되고 있다. 20세기의 예술적인 악곡으로서는 영국의 브리텐에 의한 <캐롤의 제전>이나 미국의 메노티에 의한 오페라 <아말과 밤의 방문자>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크리스마스 [Christmas, X-mas]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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