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아름다운 지리산의 밤 - 최복현님
사람, 산도 가끔은 사람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사람이 산을 닮았다는 말이 옳을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엔 좋아보였는데 만날수록 싫증이 나는 사람도 있다.
반면 처음부터 은은하게 좋아져서 오래 지속되는 참 좋은 만남도 있고,
처음엔 별로 탐탁지 않은 것 같은데 자주 만나다 보면 서로의 속내를 알게 되는 그야말로 진국인 사람도 있다.
지리산, 누군가 나에게 산에 대해 물어 볼 때, 나는 아주 위대한 명언을 말해 준 적이 있다.
˝금강산은 눈을 기쁘게 하는 산이라면, 지리산은 마음을 즐겁게 하는 산이다.˝라고.
금강산을 다녀온 후로 금강산을 굳이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현실적이 제약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탓도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리산은 이미 여러 번 다녀왔지만 내려오고 나면 다시 뒤를 돌아보게 되고, 다시 오르고 싶어지는 산이다.
문득 그 산에 다시 가고 싶었다. 물론 가려하면 우선 먹을 것을 준비해야 하고, 약간의 두려움이 앞선다.
깊은 산속이긴 하지만 새벽 산행을 하려면 어두움 속을 혼자 걸어야한다는 일이 그렇다.
하지만 앞뒤 잴 것 없이 배낭을 꾸리고, 용산에서 구례구행 10시 50분발 열차에 오른다.
잠은 열차 안에서 자고, 종일 걷는 무박 1일의 지리산 종주를 계획한다.
그래야만 짐을 줄이고, 산장에서 자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배낭에는 떡을 많이 사서 담았고, 사과 한 알, 작은 초콜릿 10개, 밤빵 5개를 준비했다.
구례에 3시 반쯤 도착한다. 거기에서 성삼재로 오르는 이들 두 명과 혼자 온 아저씨 한명 나, 넷이서 한 팀으로 만들어 택시를 불러 타고 성삼 재에 오르니 새벽 4시이다.
그나마 함께할 동행들이 있어서 좋았다.
내가 원하는 속도보다는 느리지만 날이 밝기 까지는 함께 동행 할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해서 30여분 걸으니 노고단 대피소다.
그중 한 팀인 두 분은 거기에서 해장국을 끓여먹고 가겠단다. 다른 한 분에게 물으니 거기에서 역시 아침을 먹고 출발한단다.
하지만 나로서는 오늘 종주를 마쳐야 하므로 혼자 노고단을 향해 오른다.
혼자 노고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캄캄하다. 잠시 망설여진다. 저 짙은 어둠 속으로 혼자 걸어간다는 게 약간은 두려운 것이다.
왜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나면 실상 별것 아닌 상태로 내 눈앞에 다가올 것인데, 어둠 속을 혼자만이 걷는다는 건 두렵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마치 결사항전이라도 하는 양, 10여분을 명상에 잠기며 짐을 제대로 꾸리고는 천왕봉 쪽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막상 숲 속으로 들어오고 나니까 들어서려고 마음먹을 때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안정된다.
이제는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면 되는 것이니까. 아무도 없는 숲 속, 다행히 하늘이 올려다 보인다.
아름답다. 저 하늘, 당장이라도 유리조각처럼 깨어져서 내려올 듯한 맑고 투명한 별들, 쨍그랑 소리를 내며 별비라도 내려올 듯한 은하수, 혼자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아쉽다.
누군가에게 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다. 디카를 꺼내 찍어보려고 시도해보지만 너무 어두운 탓인지 찍히지 않는다.
그렇게 하늘과 별과 나의 무언의 대화, 가끔 신선하게 스쳐지나가는 아주 기분 좋은, 아니 너무 기분이 좋아 오싹한 기운이 도는 새벽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벌레소리도 멎고, 산새 소리도 멎은 아주 고요한 새벽, 신기가 나에게 내리기라도 할 것 같은, 그래서 산신이라도 될 듯싶은 그런 기분,
너무 고요하면 고요할수록 무서운 생각이 슬그머니 마음으로 밀려든다. 그래도 이젠 운명에 맡기고 걸어갈 뿐이다.
아 불빛이다. 사람들이 있다. 여기가 다름 아닌 사막이다.
어디를 보아도 사람의 흔적도 인간의 불빛도 없는 사막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빛이 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아마도 비박을 한 모양이다. 헤드랜턴을 비추어보니 임걸령 샘터이다.
임꺽정, 임걸련, 같은 임씨잖아. 조선시대 때 의적이었다지 아마. 여기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반갑게 서로 인사를 하고, 샘가로 내려가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물통을 채워둔다. 행선지를 물으니 천왕봉으로 간다면서 좀체 떠날 기색이 없다.
아마 여기서 식사라도 해 먹고 출발할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이다.
-사유의 힘을 주는 지리산-
아직 어둡다. 할 수없이 혼자서 다시 떠난다. 그래도 사람들을 깊은 산속에서 만난 이후로 두려운 마음은 한결 적어진다.
그렇게 다시 15분가량 갔을까 다시 5-6명의 사람들과 만난다. 출발한 시간을 알아보니, 나보다 한 시간 전에 떠났다고 한다.
조금은 훤해지는 기미가 있어서 그들을 앞서서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먼동이 확연하게 트기 시작하고 이제는 두려움 따위는 없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어두워지면 두려워지는 인간의 마음, 신은 인간에게 그런 약점을 만들어 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오전 6시 15분, 3각형 모양의 뾰족한 모양을 박아 놓은 곳, 삼도봉이다.
남서쪽에서 보면 전라남도라고 새겨져 있고, 동쪽을 보면 경상남도, 북서쪽으로는 전라북도라고 새겨져 있는 곳, 3도가 나눠지는 곳이라서 삼도봉이다.
1초 동안에 3도 땅을 언제든 밟을 수 있는 곳이다. 잠시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카메라를 꺼내 삼각뿔을 찍는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출발해서 조금 더 가다보면 지난여름 백무동에서 출발하여 역으로 종주를 할 때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595계단이나 되는 목재 계단이 나를 반긴다. 지금은 내리막이라 전혀 염려가 안 된다. 시계를 보니 6시 20분이다.
저 먼 산봉우리위로 빨간 태양이 솟아오른다.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나무에 얹힌 붉은 태양이 유난히 곱다. 처녀의 홍조 띤 얼굴만큼이나 곱다.
몇 컷 찰칵 찰칵하고 계단을 내려간다. 휴식할 만한 자리가 마련된 공간들이 있다. 화개재라고도 하고, 뱀사골 정상이라고도 한다.
시간은 6시 30분, 떡 한 덩이를 꺼내 먹고, 초콜릿 5개를 먹어 치운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언덕길을 오른다. 제법 계속되는 오르막길이다. 토끼봉, 반야봉에서 묘시 방향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어서 내리막 오르막을 반복하다 보니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잠시 쉬기로 마음먹은 곳, 연하천 산장이다. 8시 10분이다. 언제 보아도 물이 콸콸 솟아 나오는 곳, 능선에 있지 않고 약간은 아늑하게 파고 앉은 곳에 자리 잡은 산장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아침을 준비해서 먹고, 치우고, 떠나는 사람 등, 북적거리고 있다.
등걸위에 배낭을 내려놓고 약수를 한바가지 쭉 들이킨다. 목구멍이 상쾌하다. 남아있던 초콜릿과 밤빵을 다 먹어 치운 후 휴대용 면도기로 수염을 밀어낸다. 15분을 쉬고 난 후 다시 출발이다.
여러 사람을 앞질러서 오르막을 오르다가 중간쯤에 갈래길이 나온다. 무심코 표지판도 보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다. 한참 내려가다 보니 낯설다.
그래도 지리산은 여러 번 와 본 터라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되짚어 올라가서 갈래 길에서 이정표를 보니 음정으로 내려가는 하산 길로 갔던 것이다. 시간을 잃은 만큼 조금 더 속도를 내서 벽소령 대피소까지 가기로 한다.
명선봉을 지나고 형제봉을 지나가야만 벽소령에 도달한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이지만 오르막이 훨씬 더 많은 조금은 힘든 노정이다.
두 형제가 득도를 하다가 요녀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서로가 등을 맞대고 견디다가 돌이 되었다는 전설의 형제봉의 암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를 돌아본다.
지리산을 종주하듯이 한평생 산다는 것이 종주라면 이런 정도의 지리산 종주를 닮은 삶이라도 행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넘어져도 일어나되 굴러 떨어지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인생을 잘 사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비틀거리며 살아도 넘어지지 않고, 결국 중심을 잡아가면서 살아가는 인생, 언젠가는 종막을 고할 내 인생을 돌아본다. 등에 짊어진 짐은 먹을 것을 먹어서 비워내도 무게는 줄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