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끝 -김충규- 실연하고 돌아오는 저녁 길은 무화과 잎처럼 딱딱해져 버린 입을 다물었습니다 무수한 애원과 변명에도 당신은 기어이 내게 뒷모습을 보였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뒷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사랑이 끝이라는 증거임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가시밭 지나오지 않았는데도 내 몸에는 가시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습니다 당신의 내면은 장편소설보다도 두꺼워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내게는 잘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눈빛을 떨며 한 장 한 장 당신의 생애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나갔습니다 내가 읽어낸 페이지가 깊어질수록 조금은 당신을 알 수 있을 듯 했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에는 당신이 손수 붉은 잉크로 밑줄을 그어 놓았지요 그 붉은 잉크가 당신의 따뜻한 피인 줄 내가 왜 모르겠어요 아아, 어느 페이지에선가 백지가 나왔을 때 난 혹여 인쇄가 잘못된 것인가 싶었습니다만 거기까지가 내가 읽을 수 있는 당신의 생애였습니다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당신의 단호함이 내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백지만 나오게 했습니다 무화과 잎을 따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시작된 우리 사랑이
서로에게 지워지지 않는 그늘을 만들 줄 차마 알지 못했습니다 이 그늘이 내 생의 얼룩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며 나는 파르르 몸을 떨었습니다 당신은 떠나고 나는 무화과나무 속으로 들어가 영영 꽃피지 않고 남은 세월을 견뎌내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