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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팁 | ||||||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을 너그러이 | 2011.08.22 | 조회 5,058 | 추천 62 댓글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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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 비결 1 -"내 몸이 담보요" 강원도 통천,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정주영은 16세에 가출, 막노동판을 전전 하다가 서울의 쌀가게에 취직을 하게 된다. 자신이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와 신용밖에 없다고 생각한 정주영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게 되고, 그 결과 쌀가게 주인과 주위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게 된다. 그리고 스물 일곱 되던 해, 정주영은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리게 되는데. 자동차 정비공장 문을 연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화재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빚을 얻어 시작한 정비공장이 전소되자, 정주영은 빚위에 또다시 빚을 지게 되고. 다시 일어서야 할 그때, 정주영에게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은 쌀가게 시절 알던 사람들이었다. 결국 정주영이 다시 일어나 오늘 현대그룹의 발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신용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2. 성공 비결 2 -"국 한 그릇, 반찬 하나" 현대그룹 총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30여년 전에 지은 그의 집엔 20여년이 넘은 소파와 10년이 다 된 17인치 TV가 전부다. 17년전 작업복을 아직도 입고 있는 정주영.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아끼는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한국 제일의 부자 정주영. 짜디짠 냄새가 나는 왕소금 회장으로 불린다. 3. 성공 비결 3 - "새벽 닭을 깨우며" 정주영 회장의 성공비결 또 하나. 그 누구보다 부지런 했기 때문이었다. 쌀가게 시절부터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문을 열고 점포를 정리했던 청년 정주영은 자신이 사업을 하던 시절에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곤 했다. 그리곤 해가 빨리 뜨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곤 했다는데. 지금도 새벽 6시 기상, 7시면 회사로 출근 한다. 4. 성공 비결 4 - "빈대도 머리를 쓰는데…" 정회장이 부하직원을 야단칠 때 늘 하는 말은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부두 노동자 시절 몸으로 익힌 정회장의 철학이 담긴 욕설이라는데. 부두 노동자 시절, 몸에 기어 오르는 빈대를 피하기 위해 네 개의 물그릇에 상다리를 담궈 놓고 상위에서 잠을 자던 정회장은 며칠 되지 않아 다시 빈대에게 시달리게 된다. 살펴 본즉 빈대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 천정 위에서 몸으로 뛰어 내린 것인데. 빈대도 머리를 쓰면 되는데, 사람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주영. 그는 사업에 있어서도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어 멋지게 성공을 하곤 했다. 한겨울 보리를 심어 잔디를 대신 했던 부산 UN묘지 공사며, 폐 유조선으로 단번에 물길을 막았던 서산 간척지 공사. 그의 성공은 상식에 매달리지 않는 신선한 발상의 성공이었다. 5. 성공 비결 5 - "오백 원으로 빌린 사천만 달러" 정주영 회장의 별명은 불도저. 그것은 한 번 마음먹은 사업을 무섭게 밀어 붙이는 추진력 때문인데. 1970년, 울산 모래 벌판에 세워진 조선소는 모두가 불가능 했다고 말한 사업이었다. 자본도, 기술도 없던 시절, 그곳에 조선소가 세워지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오직 정주영 뿐이었다. 울산 모래 벌판의 사진 한 장을 달랑 들고 당시 우리나라 1년 예산의 반에 해당하던 4500만불의 차관을 얻어 세계 최대 규모의 도크를 만들었던 정주영. 그는 조선소 도크 건설과 동시에 26만톤 짜리 두척의 배를 만드는 세기적 실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30개월 후, 대한민국 최초로 만든 거대한 유조선은 한국을 세계 제 1위의 조선국으로 도약시키게 된다. LG그룹 구자경 구자경 회장의 비하인드 스토리 매스컴 기피증이란 말이 돌 정도로 매스컴에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구자경 회장.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럭키를 물려받아 현재의 LG로까지 이끌어 온 과정, 은퇴에 얽힌 얘기와 은퇴 후의 생활들,..... 1. 성공 비결 1 - "경험은 밑바닥부터" 생산현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경영자. 스스로 연구하고 현장을 뛰는 경영자. 어떻게 그는 현장을 잘 아는 경영자가 됐을까? 산업의 기본은 제조업이고 제조업의 기본은 기술이라는 구자경의 성공 철학 하나! 2. 성공 비결 2 - "작은 것부터 아껴라" "뭉치돈 나가는건 표가 나서 신중해지지만 작은 돈은 그렇지 않다. 작은 돈을 쓰는데 더 신중해야 한다" 는 특유의 금융 철학. 계산도 하기 힘든 재산을 가졌으면서도 남은 음식 몇 조각, 동전 몇개의 소중함을 아는 구 회장의 몸에 밴 검약 정신을 갖고 있다. 3. 성공 비결 3 - "창의와 모험 정신" 있는 돈 다 싸서 외국으로 달아날 궁리를 하던 6.25의 혼란기에 전 재산을 투자해 플라스틱 산업을 시작한 아버지 구인회와 유전공학이란 말조차도 생소하던 시절 유전공학에 2500억을 투자해 14년 만에 거대한 성과를 얻어낸 아들 구자경. 그들은 어째서 그런 모험을 했던 것일까? 창의와 모험 정신, 구자경의 성공 철학 셋! 4. 성공 비결 4 - "기업은 사람이다" 누구도 구자경의 존재를 모르던 때, 세상을 놀라게 하며 계승한 그룹 회장직. 아루런 잡음없이 끌어온 50년 세월, 그 비밀은? "실천과 원칙 그리고 합리성이 있는 인화 만이 진정한 인화다." 구자경의 성공 철학 넷! 프로바둑기사 조훈현 한국 최고의 프로바둑 기사는 누구일까? 혹자는 이창호라고 말할지 모른다. 내제자로 들어간지 6년 만에 스승 조훈현을 꺽은 무서운 소년 이창호는 한국 바둑을 제패하며 아무도 꺽을수 없는 무적의 승부사 처럼 보였다. 제자에게 타이틀을 빼앗기고 무관의 제왕으로 추락해야 했던 조훈현. 사람들은 이제 조훈현의 시대가 갔다고 했다. 조훈현은 이제 다시 일어나지 못 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97년. 사람들의 예상은 깨어졌다. 네 번의 시합에서 조훈현이 이창호를 격파한 것이다.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재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프로 기사의 세계. 조훈현은 불사조였다. 한국 바둑의 역사를 이끈 사람. 세계 바둑의 물줄기를 바꾼 사람. 한국 바둑 역사에는 몇 개의 세계 최고 기록들이 있다. ·세계 최연소 입단 ·세계 최다승(97년 3월 까지 1109승) ·세계 3대 대회 그랜드 슬램 그리고 한국 바둑 전관왕 3회라는 신화적 기록. 이 모든 기록을 세운 사람은 조훈현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기록은 깨어지지 않고 있다. 조훈현이 우리 바둑에 끼친 영향은 기록 뿐만이 아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바둑이 일본 바둑을 따라 잡는 것은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89년 응창기배에서 일본 바둑을 꺽고 한국 바둑을 세계 최강의 바둑으로 우뚝 세운 주역 또한 조훈현이었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 바둑의 최정상을 지켰던 조훈현. 그는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한국 바둑의 가장 큰 봉우리다. ⊙ 성공 비결 1 : 천재 - 될 떡잎은 일찍부터 키워라! 바둑의 천재라 불리웠던 조훈현. 그의 천재성이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조규상 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 조규상 씨는 일본에서 유학까지 마쳤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목포에서 작은 지물포를 운영하던 인텔리였다. 그런 그가 아들 조훈현의 재주를 발견한 것은 조훈현의 나이 4살 되던 해의 일. 아들의 천재성을 꽃피우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선생님이 필요했다. 스승을 찾아 고향의 생활 기반을 버린 채, 아들의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 온 조규상 씨. 그는 자식을 위해 위해 보문동 시장에서 야채행상을 하며 리어카를 끌어야 했다. 아버지 조규상씨. 그는 어떻게 아들 조훈현의 천재성을 발견 했으며 어떻게 천재성을 길러 준 것일까? ⊙ 성공 비결 2 : 스승 - 좋은 재목은 좋은 스승에게 조훈현이 일본을 떠난 것은 10살 되던 해. 한국에서 프로 2단이었던 조훈현은 일본에서 4급 판정을 받게 된다. 그 일로 너무나 커다랗게 자존심이 상했던 10살 꼬마 조훈현. 그 때 그가 이를 악물며 했던 결심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조훈현의 일본 시절을 이야기를 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두 사람은 조훈현에게 정신을 가르쳤다는 세고에와 바둑의 기술을 가르쳤다는 후지사와다. 내제자라곤 단 두 사람만 길러 냈던 세고에. 그가 기른 제자는 바둑의 신이라 불리운 오청천과 하시모토였다. 스스로 두 제자만으로 족하다고 했던 세고에. 그는 왜 조훈현을 내제자로 받아 들였던 것일까? 또, 술과 노름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면서도 바둑의 기술로는 따라 갈 사람이 없다는 후지사와. 그는 왜 조훈현을 그토록 아꼈던 것일까? 내제자를 길러 세계 최고의 바둑 기사를 배출하는 일본 바둑계의 명문들. 스승은 제자에게 평생 3판의 바둑만 두어주는 것이 관례라는 그 곳에선 어떤 교육이 이뤄지며 스승과 제자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일까? ⊙ 성공 비결 3 : 투혼 -투혼을 기르려면 배고픔을 배워라! 조훈현은 승부사다. 그것도 마지막까지 절대로 승부에 대한 집념을 놓치지 않는 질긴 근성의 승부사다. 그의 이러한 승부 근성은 20대 처절한 배고픔의 시절을 거치면서 터득한 것이었다. 바둑 수업을 채 끝내지 못한 채, 병역 의무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 조훈현에게 닥친 현실은 병석에 누운 아버지와 버는 사람 하나 없이 당장 내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집안 살림이었다. 거기다 한국말 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겪어야 했던 군생활. 조훈현은 밥을 위해, 여동생의 등록금을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타이틀을 따야만 했다.시합에 질 때마다 넓은 연병장을 기어 들어 오며 자신을 채찍질 했다는 조훈현. 그의 배고팠던 젊은 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성공 비결 4 : 맞수 1, 2 - 10년 동안 불태운 집념 오랜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키다 보면 교만과 타성에 스스로 지쳐 버리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조훈현은 76년 최고위 타이틀을 시작으로 89년 응창기배에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정상에 설 때 까지 단 한 번도 정상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조훈현이 그토록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영원한 맞수 서봉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훈현은 말한다. 내가 독기를 가지고 정상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서봉수' 때문이 아니었다. 나의 맞수는 또 다른 곳에 있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맞수를 향해 끊임없이 칼을 갈았기 때문이었다. ⊙성공 비결 5 : 맞수 3-마음을 비워야 다시 일어난다 89년.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패배하자 사람들은 조훈현의 시대가 갔다고 했다. 내제자 이창호에게 꺽인 조훈현은 다시는 재기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97년 4월 KBS 바둑왕전, 5월 SK 텔레콤 배달왕기전, 9월엔 유공배 명인전에서 이창호를 꺾으며 조훈현은 다시 일어 났다. 나이 40을 바둑계에선 환갑이라 부른다. 신경을 곤두세운 10시간이 넘는 대국에서 체력이 딸리면 머릿속이 공백상태에 빠지며 더 이상 계산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 나이 마흔다섯의 조훈현이 다시 일어났다. 영동대 총장 김재규 동네 말썽꾸러기와 평범한 시골 농부에서,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 끝에 뜻 깊은 결실을 이뤄낸 한 대학 총장의 인간 승리 이야기 ◆ 한 마디의 격려로 바닥이던 수학 성적을 최고로 끌어올린 일화 ◆ 첫 번째 도전, 교사 자격 시험 이후의 얽힌 이야기 ◆ 고등교사 보통고시 고등고시 대학교수 합격과 그 외의 것들 ◆ 대학의 수장이 된 그의 공부와 성공의 비결 ◆ 언행일치라는 그의 철학 등 오늘의 그를 만든 비결 ⊙성공 비결 1 : 타고난 성공은 없다 동네 말썽을 도맡던 어린 시절, 한 교사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바닥이던 수학성적이 최고로 오른 작은 기적. 한 마디의 격려로 변화된 그의 인생은 한날 결혼한 이웃 선생의 부인이 아내 동창인 것을 알고 또 다시 변화의 노력을 시작하는데... ⊙성공 비결 2 : 자존심을 굽혀라 20년의 수험 생활에서 그의 첫 번째 도전은 교사 자격 시험. 결과는 전 과목 실패. 몇 년의 도전 끝에 초등학교 교사의 꿈을 이루고. 실력없는 교사란 말이 싫어 열성으로 가르치던 김재규. 그가 다른 학교로 전근할 때, 아이들이 횃불 시위를 했다는 전설적인 얘기가 있는데.... ⊙성공 비결 3 : 서 있는 그 자리가 중요하다 행복했던 초등학교 교사 시절. 그러나 그에겐 새로운 꿈이 싹트고. 김재규는 중학교 교사 시험에 도전하는데. 뒤이어 고등학교 교사, 보통고시, 고등고시를 합격한다. 안정될만 하면 새로운 도전길에 나서는 김재규. 거기에도 만족하지 못해 대학교수 시험에도 합격하고. 평범한 시골 농부였던 김재규를 고급 관료로, 국내 최고 대학들의 명교수로. ⊙성공 비결 4 : 돌아간다고 늦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겐 새로운 꿈이 싹트고. 김재규는 중학교 교사 시험에 도전하는데. 뒤이어 고등학교 교사, 보통고시, 고등고시를 합격한다. 안정될만 하면 새로운 도전길에 나서는 김재규. 거기에도 만족하지 못해 대학 교수 시험에도 합격하고.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나라의 수재들이 모인 서울대, 연, 고대 학생들까지 가르치고 결국은 대학 총장까지.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시험은 운전 면허. 쉽게 학원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을 독학으로 연습해 4번 만에 합격. 오히려 한 번에 된 시험은 재미 없다고 말하는 김재규. 학력위주 사회에서, 가장 낮은 학력으로 가장 높은 학교의 수장이 된 김재규. ⊙인생 철학 : 언행일치!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해야한다는 지론을 자신에게, 또 자식에게도 실천한 사람. 손재주 좋은 아들이 대학을 관두고 정비사 일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받아들이고 정비사인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김재규.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그의 인생 철학들. IOC위원 김운용 ⊙ 성공 비결 1 : 외국어는 세계로 가는 지름길! 김운용 위원이 구사하는 언어는 총 6개국어. 그 중 러시아어는 88올림픽 준비 과정 예순이 넘은 나이에 배운 것이었다. 일찌기 국제화 시대에 무기는 외국어임을 깨닫고 학창 시절부터 열성으로 공부한 영어, 불어, 스페인어, 독어, 일어 등은 오늘날 그가 세계적인 스포츠 외교관이 되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 ⊙ 성공 비결 2 : 차선도 최선이 될 수 있다 고시 원서 접수 5일 만에 터진 6.25. 외교관의 꿈을 접어둔채 선택한 군대. 그러나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통역 장교로 맹활약, 국방장관 보좌관을 거쳐 드디어 주미 대사관 참사관 발령을 받게된다. 그러나 외교관 생활도 잠시, 청와대 경호실에 불려 들어온 그는 당시 분규 단체로 분류되던 태권도 연맹 회장직을 제의받고 고민에 빠진다. 2달만에 결단,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주어진 차선에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즉 IOC 부위원장으로 이어지는 그의 성공 가도가 시작된다. ⊙ 성공 비결 3 : 준비는 소리없이, 결정은 신속하게 ! 소리없이 준비하고 결정타를 친다. 김운용의 일에 대한 신조이다. 그의 첫 국제 무대 데뷔였던 74년 세계 사격연맹 총회에서 준비 없는 유치 경쟁이 얼마나 큰 모험인 지를 깨달은 그는 이후 무엇이든지 철저한 준비와 신속한 결정으로 각종 국제 대회 유치를 주도한다. 특히 88올림픽 유치때와 태권도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시 그의 이러한 수완은 빛을 발하게 된다. ⊙ 성공 비결 4 : 사람이 힘을 만든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때 일본이 태권도를 종목에서 제외시키고 김운용이 이에 대한 해결로 동분서주할 당시 아시안 올림픽평의회 회장 쿠웨이트 세이크아메드의 방문이 있었다. 국기원에 그의 부친의 생전 활동 모습을 준비해 둔 김운용. 물론 세이크아메드는 눈물을 흘리며 감회에 젖고... 며칠 뒤 히로시마에서 열린 총회에서 세이크아메드는 태권도의 채택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된다.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법을 알았던 김운용. 즉 상대가 뭘 원하는 지를 알고 그것을 줄 수 있었던 김운용 만이 가능했던 일이다. ⊙ 성공 비결 5 : 내 성공의 절반은 여자 ! 오늘날의 김운용이 있기까지 그를 만든 두 명의 여자가 있다. 청상의 몸으로 자식 교육에 온 힘을 바쳤던 그의 어머니와 김운용이 자신의 보좌관이라 칭하는 그의 아내가 바로 그들. 교육부 장관 이명현 왜 이명현인가? 우리나라 교육 행정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교육부. 그곳의 최고 수장인 이명현 교육부 장관의 이력은 일반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평북 신의주 출신으로 월남. 제주도를 거쳐, 서울에 정착한 그는 그시절 모두가 그랬듯이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런 까닭에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한 그는,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에 입학, 서울대 교수, 교육부 장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천국을 꿈꾸듯이 고통 속에서 희망을 꿈꿀수 있다"고 말하는 이명현. 유년 시절 겪었던 6.25, 대학 시절 겪었던 4.19. 그리고 교수 시절 부딪혀야 했던 5.18. 그 역사적 격랑 속에서 그는 무엇을 꿈꾸었던 것일까? 암울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고통을 세상을 헤쳐나갈 새로운 힘으로 바꾸었던 이명현, 그의 성공 비결은. 성공 비결 1 :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이명현. 목욕탕 때 건지는 일에서 전차표 판매원,신문팔이, 학교 급사 등 사회 밑바닥에서 생업을 유지해야 했던 유년시절을 통해 그가 얻은 삶의 철학-세상에 공짜는 없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는 믿음은 오늘의 그를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공 비결 2 : 강한 어머니에 강한 아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대낮에 월남을 강행했을 정도로 담대하고 강한 이명현의 어머니. 그리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식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언제나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이기도 하였다. 자식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자신이 죽음을 알리지 않고 세상을 뜬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명현은 눈물을 흘린다. 부모가 자식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성공 비결 3 : 여자를 멀리 하라 여자를 사귀면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여자 사귀기를 꺼려하던 그가 나이 44세에 결혼을 하여 붕어빵 같은 아들을 낳고 언제나 신혼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성공 비결 4 : 생각한대로 행동하라 이명현은 고집불통, 원칙주의자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그의 삶의 태도는 4.19를 거치면서 '새생활 운동'과 5.18 이후 해직과 복직의 수난을 당하면서도 지켜온 원칙이다. 이제 교육부 장관이 되어 자신의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로 실현하고 있는 이명현. 대학시절 4년 장학금 수여의 기회를 잃으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던 이명현. 중소기업 중앙회장 박상희 은행원에서 1천만원 자본의 철강 도매상으로 시작, 매출 4천억의 기업을 일으킨 중소기업중앙회 최연소 회장 박상희의 인생과 경영 철학, 그리고 오늘의 그를 만든 비결. 은행원은 사업에 성공 못 한다는 통설을 뒤집은 사람. 단돈 1천만 원으로 철강 도매상에서 시작해 매출 4천억의 미주를 일으킨 중소기업 중앙회의 최연소 회장. 신입 사원 시절 직원을 하인 부리듯 하던 상사에게 대항한 기백, 동료의 10배가 넘게 수신고를 올리던 노력으로 그의 은행원 생활은 탄탄대로를 달렸는데. 그러나 고졸 사원으로는 그의 꿈인 은행장은 너무 멀었고 새로운 꿈을 위해 박상희는 지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진철강을 인수해 사업에 투신한다. 혁신적인 경영으로 매출을 올리던 그는 철강 제조업 진출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제조업에 뛰어드는데.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찾아온 실패, 두 번의 실패를 통해 얻은 준비하는 자세로 IMF 한파도 이겨내고 있는데. 중소기업 중앙회 회장으로 중소기업인 출신 최초의 전경련 회장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사업가 박상희. 사장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표상이 되려는 박상희를 통해 어려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한다. 성공 비결 1 :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라 편안한 동료들과 어울리거나 집에 돌아가 쉬고 싶은 퇴근 후 시간, 그는 이 시간을 만남에 투자하는데... 부지점장이라 불릴 정도로 탁월한 예금 수신고, 대진철강 인수, 모든 것이 퇴근 후 만남의 결과이고, 입사해 20여 년 전부터 만난 사람들은 이날까지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산이다. 성공 비결 2 : 차별화 전략을 세워라 보수적인 철강 도매업계에서 파격적인 경영 전략을 펼치는데. 세금 계산서 무조건 발급, 당시로는 귀하던 자가용을 이용한 기동력있는 영업, 팩시밀리를 이용한 고객 관리. 남 하는대로 하면 2등 밖에 못한다는 신념으로 경영 1년 만에 매출을 몇 배로 늘린다. 성공 비결 3 : 알아야 면장을 한다 힘든 사업을 하면서도 계속 공부하던 그에게 처음으로 위기가 닥쳐온다. 거래처가 부도가 난 것. 돈을 받을 유일한 방법은 거래처 사장이 미리 직원에게 넘긴 채권을 미리 확보하는 것인데. 그는 어떻게 이 위기를 넘겼을까? 경영자는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전천후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데. 성공 비결 4 :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거액을 투자한 섬유업이 믿었던 직원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박상희는 실패의 쓴맛을 보게되는데. 한우물을 파야한다는 것을 깨닫고 철강에 전념해 엘리베이터 레일 등 특수강 부분에 독보적 기업이 되고. 성공 비결 5 : 한발 앞서 생각하라 번거롭지만 값싼 목재 거푸집이 당연하던 시기에 철제 거푸집의 필요를 예상한 박상희. 2년간의 기다림 끝에 대히트를 친 거푸집은 오늘날 미주를 이루는 밑거름이 된다. 언제나 한발 앞서 준비하는 그에게 닥쳐온 새로운 위기 IMF. 이 위기도 기회로 생각하고 또 앞설 준비를 하는 박상희는 앞으로 어떤 비상을 할까? 거평그룹회장 나승렬 초등학교 졸업에 무일푼으로 서울 상경, 막일 야채 행상 등에서 출발 갖은 고생 끝에, 현재 22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28위의 탄탄한 기업을 일궈낸 나승렬 회장의 파란만장한 삶과 특유의 경영 철학, 그리고 오늘의 그를 있게한 네 가지 성공 비결. 성공 비결 1 : 짧은 학력을 넘어서다 나승렬 회장의 학벌은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 그리고 잘 생기지도 못한 인물의 소유자다. 학연과 연줄이 중시되는 우리 사회 풍토에서 학벌 없고 인물 없고 돈 없는 그가 성공을 일궈낸 이유는? 바로 그의 발로 뛰는 노력이었다. 성공 비결 2 : 낮은 산부터 정복하라 가난때문에 중학교 입학을 포기한 나승렬은 무임승차로 서울에 상경, 고달픈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막일에 야채행상, 도둑질 빼놓고는 다했다는 이 시기의 나승렬 회장은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배움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경리학원에 다닌다. 숫자 감각은 타고났다는 그는 주산, 부기, 회계에 빼어난 두각을 나타내 (주)한국전자라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고, 뒤이어 (주)삼강에 과장으로 스카웃하는 등 오랜 고생끝에 기반을 잡게 된다. 성공 비결 3 : 70%만 투자하라 돈이 도는 곳에는 그가 있다. 셈이 빠른 그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부동산에 투자하는 등, 돈이 모이는 곳을 제대로 짚어나간다. 특히 88년 부동산붐을 타고 기획한 센츄리 오피스텔 등의 연이은 히트로 오늘날의 거평을 이루는 토대를 만들게 된다. 모두 말리던 거평 프레야 사업도 그의 계획대로 대성공을 거두고. 그의 시의 적절한 기업의 인수 합병은 일본 NHK에서 'M&A'의 황제로 소개할 정도이다. 특히 94년 대한중석을 인수했던 일은 재계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삼킨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의 이러한 고도의 인수합병 전략은 서울대에서 M&A 에 대한 강연을 할정도. 현재 거평그룹은 22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28위의 기업이 되었는데. 가진 돈의 70%만을 투자함으로서 항상 여유를 가지고 기업을 안정적으로 끌어가는 게 그의 경영 전략이 되었다. 성공 비결 4 : 절약! 절약! 절약! 벌고 안쓰면 돈을 번다는 그는 백화점에서도 물건값을 깎고 뒷축이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닐 정도로 자린고비에다 회사에도 짜장면을 시켜먹는 소탈한 인물. 이러한 검소함이 오늘날 그를 만든 또 하나의 이유. 그리고 이것은 오늘의 최악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쉽게 자초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거평의 힘이 되고 있다. 삼애실업사장 정덕 IMF의 격랑 속에 수많은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의 경제 상황 속에서 기업들에게 과연 탈출구는 과연 없는 것일까? 여기 삼애실업이라는 중소 기업의 알찬 경영 원리를 그 해답으로 제시한다. 은행돈 한 푼 빌리지 않으며, 부동산 투기, 탈세 한 번 안해보고 달려온 융통성 없는 정덕 사장의 경영 25년. 그러나 이제 삼애실업을 기업 안정도 3위에 랭킹시키는 알찬 경영의 빛을 발하고 있다. 근검절약하는 생활 자세와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삼애실업을 굴지의 기업으로 일구어 내고 있는 정덕 사장. 한 걸음씩 내실있는 성장을 이룩한 삼애실업은 기업들의 새로 태어나기의 모범답안으로, 그리고 창업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침서가 될 것이다. 성공 비결 1 : 성실한 직장 생활에서 창업이 싹튼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정덕 사장. 그러나 구두가 석 달이 못가도록 열심히 일하는 그의 생활은 오늘을 낳은 가장 근본적인 자양분이 되고 있다. 대우실업 피혁 파트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오늘날 그가 창업에 뛰어들어 성공하게 된 가장 중요한 지침서로 작용한다. 결혼하기 전, 처남이 정덕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기 위해 회사에 왔다가 열심히 뛰어 다니는 그의 모습에 반했을 정도라고 하는데... 한 번 주어진 임무는 반드시 성사시켜 왔던 정덕의 직장 생활. 그 때의 직장 생활이 오늘의 삼애실업을 경영하는데... 성공비결 2 : 한 번 들어온 돈은 놓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가 주신 차비를 저축하고 뛰어 다닐 정도로 구두쇠였던 정덕. 그는 이후 고등학교 대학시절. 여러 아르바이트를 거쳐 1백 50만 원이라는 돈을 모은다. 이렇게 모은 돈이 종자돈이 되어 삼애실업을 세우는 창업 자금을 만든 정덕 사장. 어려서부터 몸에 밴 절약 습관은 삼애실업의 경영의 원칙이기도 하다. 화물비가 아까와 직접 50kg 이상의 무게가 되는 샘플을 들고 다녔던 초창기 시절. 은행 이자가 아까워 자기 자본만으로만 회사를 키워온 그의 집념. 그러한 그의 고집은 IMF 한파를 이기는 묘법으로 꼽히고 있다.이제 어엿한 기업의 사장이 된 그는 여전히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고 무료 주차장을 사용하는 자린고비 근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런 삼애실업은 중소기업 중 사원 아파트를 제일 많이 가진 기업이기도 하다. 자린고비 정 사장이 무슨 이유로 틈틈히 임대 아파트 66채를 지었을까. 성공비결 3 : 정면으로 승부하라 무명의 삼애실업이 한국의 피혁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유럽 시장의 바이어들을 직접 찾아다닌 정덕 사장의 추진력이다. 50kg이 넘는 제품을 싸가지고 바이어 사무실을 찾아 다니던 그의 마케팅 방법은 당시로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던 것으로 이런 정덕 사장의 적극성이 바로 한국 피혁의 수출길을 닦는 초석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추진력과 승부욕의 밑에 반드시 깔려 있어야 하는 정덕 사장의 경영 원칙은 품질과 신용이다. 자신이 만든 제품에 대해서는 손해를 보더라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그의 경영 신조는 바이어들에게 '삼애'하면 품질의 신용의 보증 수표로 통하고 있다. 답답할 정도로 원칙을 지키려는 정덕 사장, 그는 작은 제품 하나하나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다. 성공비결 4 : 맑은 경영이 튼튼한 회사를 만든다 은행 돈을 쓰지 말라는 독일 바이어의 충고를 삼애실업의 제일 경영 원칙으로 삼고 있는 정덕 사장. 그는 은행 자본을 쓰기 보다는 정확한 납세를 통해 회사의 수익을 유보시키는 방법으로 삼애를 성장시키는 맑은 경영을 하고 있다. 각종 부정거래가 판을 치는 우리의 기업 현실에서 정사장의 맑은 경영은 더욱 값진 것이다. 바이어들에게 라면을 대접하며 접대비 등에 돈을 쓰지 않는 정덕. 그는 호화 접대가 오히려 바이어들에게 제룸의 품질에 의심이 가게 한다고 하는데... 세무조사를 나온 세무서 직원들에게 감사를 받았다는 삼애실업의 세무조사. 고가 상품인 모피는 취급하지 않는 정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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