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머리털로 여러 가지 머리 모양을 만들어 머리에 쓰는 것이 가발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끝없이 필요로 했던 가발. 우리 역사 속 가발에 대해 살펴보자.
오랜 역사를 가진 가발
가발은 대머리를 감추거나 햇볕으로부터 두피를 보호하는 등의 역할도 있지만, 외모를 돋보이게 하거나 신분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기원전 6,000년경 칠레 지역에 살던 친초로족 태아 머리 미라에는 가발과 가면을 씌운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이집트에서도 기원전 3,400년 이후 붙이는 가발이 성행했는데, 벽화나 석상 등에 가발을 한 여인들의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에도 배우들이 분장을 위해 가발을 사용하기도 했다. 중국의 경우에도 [주례(周禮)]에 왕후의 머리치장과 꾸미개 등을 만드는 ‘퇴사(退師)’라는 자들이 편(編- 머리를 땋고 빗는 빗, 끈, 가발 등의 꾸미개)을 담당한다고 기록될 만큼, 가발이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가발은 우리 역사에서도 일찍부터 사용되었다. 가발은 체발(髢髮), 얹은머리(髢髻), 가체(加髢), 가결(假結) 등 다양한 용어로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한다. 체(髢)는 머리숱이 적은 사람에게 덧대는 가발로 ‘다리’, ‘월자(月子)’로도 불렸다.
고구려의 가발
[삼국사기]에는 251년 고구려 중천왕의 왕비와 관련된 일화가 등장한다. 당시 머리털이 9척이나 되는 장발 미녀가 왕의 총애를 받자, 왕비는 이를 질투하여 왕에게 “이웃한 위(魏:220〜265)나라에서 엄청난 보물을 내걸고 장발을 구한다고 하니, 우리가 사신을 시켜 장발 미녀를 보낸다면 위나라가 이를 반기어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발을 구하는 것은 아름다운 가발을 만들기 위함이다. 위나라에 가발 풍속이 있던 만큼, 고구려 또한 일찍부터 가발을 알고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황해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 3호분의 벽화. 4세기 고구려의 벽화로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얹은머리를 하고 있다.
357년에 만들어진 안악3호분 벽화에 그려진 무덤의 여주인공은 머리에다 가발을 올리고 장식비녀를 꽂는 큰 얹은머리(高髻)를 하고 있다. 옆의 시종들도 마찬가지로 큰 얹은머리를 하고 있다. 5세기에 만들어진 천왕지신총 널방 북벽에 그려진 여주인공도 가발을 사용한 듯 큰 얹은머리를 하고 있다.
머리털을 수출한 신라
723년 신라 33대 성덕왕은 당나라에 인삼, 우황, 과하마, 금, 은, 조하주 등의 실크류와 함께 미체(美髢)를 보낸 바 있다. 869년에도 당나라에 4자 5치(135cm) 길이의 다리 150냥(5.6kg)과 5자 3치(159cm) 다리 300냥(11kg)을 보냈다. 그 시절에는 다리가 귀금속만큼이나 귀하게 여겨진 만큼, 이 정도 분량이면 매우 값비싼 것이었다.
그런데 신라는 662년 2월 처음으로 당나라에 머리털을 보낸 적이 있었다.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평양 주변에 머물던 당나라 소정방 군대에게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이 군량을 원조해주면서 아울러 머리털 30량을 보낸 것이다. 신라는 730년에도 당나라에 머리털(頭髮) 80냥을 보냈고, 734년에는 머리털 100냥을 보냈다. 이렇게 보낸 머리털은 가발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머리털을 불에 태워 만든 재인 난발회(亂髮灰)가 피를 멎게 하는 지혈제 등의 약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한참 전쟁 중이었기에 지혈제가 많이 필요했고, 신라에서는 지혈제로 사용되기 위한 머리털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당서(新唐書)] ‘신라전’에는 신라 남자들이 머리털을 깎아 팔고 검은 모자를 쓴다고 하였는데, 머리털을 판 것은 가발 수요 때문만이 아니라 이처럼 머리털의 또 다른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수탈의 대상이 된 머리털
가발의 수요 탓이든 지혈제 제조 탓이든, 머리털은 자주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 명종(1170〜1197) 때 추밀원부사를 지낸 조원정(曹元正)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포악한 자로, 일찍이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을 때 남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았고, 머리털을 길게 기른 사람을 보면 반드시 잘라서 다리(髮)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두 바리(駄)나 되었다고 한다.
조선출신 환관으로명나라 조정의 총애를 받아 태감이 되어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조선을 많이 괴롭히던 윤봉(尹鳳)이란 자에게 조선에서는 1456년 각종 선물을 준 바 있다. 이때 가늘고 긴 머리털로 만든 가발(細髮長髢) 50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가발은 값비싼 선물이기도 했다.
몽골에서 들여온 머리 패션
화려한 비단에 보석으로 장식된 몽골의 복타크. 원 지배기의 고려시대에는 두 나라 사이의 문화교류가 비교적 활발했는데, 몽골의 복타크가 족두리의 원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gettyimages>
[조선왕조실록] 영조 32년(1756년) 1월 16일자 기록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있다.
“사족(士族)의 부녀자들의 가체(加髢)를 금하고 족두리(簇頭里)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가체의 제도는 고려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곧 몽고의 제도이다. 이때 사대부가의 사치가 날로 성하여, 부인이 한번 가체를 하는 데 몇 백 금(金)을 썼다. 그리고 갈수록 서로 자랑하여 높고 큰 것을 숭상하기에 힘썼으므로, 임금이 금지시킨 것이다.”
위 기록에는 가체 풍습이 몽골에서 전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며, 13세기 몽골과 접촉하기 이전인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에 가발 풍습이 있었다. 고려 때에는 왕실 비빈, 귀족부인, 궁중여관 등이 가체머리를 한 후, 부챗살 모양의 머리장식 등으로 꾸미는 것이 크게 성행했다.
몽골에서 전해진 것은 고고관이란 관모다. 몽골어로 복타크(ВОГТАГ)라 불리는 고고관은 고구려 통구사신총 벽화에 그려진 학을 탄 신선의 모자에서도 유사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고고관은 지체 높은 귀부인의 상징적인 관모로, 자작나무로 틀을 높이 만들어 비단으로 감싼 후 각종 보석과 깃털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낙타털 즉 족도르를 더하여 장식하기도 한다. 때문에 족도르를 붙인 모자를 지칭하는 족타이에서 족두리가 유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몽골의 영향으로 인해 높은 머리를 만드는 것이 고려, 조선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위해 가발의 사용이 늘어나게 되었다.
사치의 대상으로 지목된 가체
조선시대에 들어와 가체는 부녀자들의 머리 장식에 필수가 되었다. 사람들은 높은 머리를 좋아하여 사방의 높이가 한 자가 되었는데, 이는 다리를 더하여 얹은머리를 높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가체가 성행하자, 유학자들은 차츰 중국의 사례까지 들먹이며 고계(高髻- 다리를 많이 얹어 높게 만든 머리 모양)와 광수(廣袖- 넓은 소매)를 사치의 대명사로 지적하고 백성들이 검소하게 지내야 한다며 이를 금지할 것을 촉구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시문집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복식(服食)’ 편에는 당시 부녀자들의 머리치장에 드는 비용이 너무 과다하다는 비판이 실려 있다.
“지금 부인들은 비록 마지못해 세상 풍속을 따른다 하더라도 사치를 숭상해서는 안 된다. 부귀한 집에서는 머리치장에 드는 돈이 무려 7~8만에 이른다. 다리(月子)를 널찍하게 서리고 비스듬히 빙빙 돌려서 마치 말이 떨어지는 형상을 만들고 거기다가 웅황판(雄黃版)ㆍ법랑잠(法琅簪)ㆍ진주수(眞珠繻)로 꾸며서 그 무게를 거의 지탱할 수 없게 한다. 그런데도 그 집 가장은 그것을 금하지 않으므로, 부녀들은 더욱 사치스럽게 하여 행여 더 크게 하지 못할까 염려한다. 요즘 어느 한 부잣집 며느리가 나이 13세에 다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졌다 한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
가체 금지령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18세기의 작품으로 조선 후기의 복식과 가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얹은 머리를 하고 있다.
조선은 사치를 금지하는 나라였지만, 과시하고 싶은 사람의 속성상 사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1756년 영조는 부녀자들의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를 쓰도록 명령했다. 사대부가의 사치가 날로 성하여 부인이 한번 가체를 하는데 몇 백 금을 쓰고, 갈수록 서로 자랑하며 높고 큰 것을 숭상하기에 힘썼으므로 영조가 직접 금지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1763년 영조는 부녀자의 머리 장식(髢髻)의 옛 제도를 회복시키라고 명했다. 족두리도 구슬 등으로 장식할 경우 여전히 사치스럽기 때문이었다. 다만 덧대는 가발(髢)의 사용만큼은 금지시켰다.
영조 대의 조치가 미흡했던 탓인지, 가체 풍습은 정조 시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일성록(日省錄)]에따르면 1783년 당시 가체의 가격이 과거에는 100냥이었는데, 지금은 4∼5백냥도 부족하여 심지어 1,000냥에 가깝다고 지적하고 있다. 때문에 1786년에는 여러 신하들이 간단한 상소문인 차자(箚子)를 올려 가체를 높이 올리는 풍속을 바로잡자고 할 정도였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따르면 1788년 정조는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을 만들어 편체(編髢- 가발)를 머리에 얹거나 본발(本髮)을 머리에 얹는 제도를 거듭 금하여 족두리로 대신하게 했고,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부류와 공사천(公私賤- 공노비와 사노비)은 본발을 머리에 얹는 것을 허락하되 높이는 4척으로 제한했다. 이로 인해 천금(千金)을 낭비하는 폐단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고 했다.
가체로 인한 문제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이 만들어지자, 부작용도 생겼다. 정조 시대 각종 범죄인에 대한 판례집인 [심리록(審理錄)]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가체 금지 관원을 사칭하는 이기성(李基成)이란 자에 대한 판례가 나온다. 1789년 서울 출신인 이기성은 7촌 아저씨를 협박하여, 나라에서 금하는 가체를 했는지 조사한다며 돈을 갈취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가체를 금지하는 것을 빙자하여 민간에 출몰하는 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곧바로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로서 처벌할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가체를 금지하는 법령은 쉽게 정착되지 못했다. 1790년에는 지평(持平- 사헌부 5품 관직) 유경(柳畊)이 다시금 가체 금지하는 법의 엄격한 시행을 청하기도 했다. 그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범하고 비천한 여인들의 가체(本髢)의 부피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가체를 거듭 단속하자, 1794년 무렵에는 머리를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미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뒷머리가 점점 높고 커졌다. 가체가 서서히 사라지고 족두리로 변한 것은 1800년대 순조 무렵부터였다.
가발의 종류
가발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었다. 어여머리는 대례식과 같은 의식 때 하는 머리로 비(妃), 공주, 옹주가 할 수 있고, 양반가에서는 당상관 부인이 할 수 있었다. 어여머리는 1751년 이후로 시작되어 긴 머리카락을 땋아서 떠구지 모양으로 만들었던 것이 그 후 간편하게 되면서 나무로 비슷한 모양을 깎아 사용했다.
대수(大首)는 궁중의 의식용 가체로 의친왕비 김씨(1878~1964)도 대수를 했다. 큰 머리는 의식이나 혼인 때 사용했다. 큰 머리를 할 때 가발의 일종인 월자(月子)를 사용하기도 했다.
새앙머리는 궁중의 아기상궁이 하는 머리로, 궁중에 들어올 때 사용했다. 첩지는 상류층 여성들이 액세서리로 사용한 가발이다. 얹은머리 의 경우 서민들은 제머리만으로 얹은머리를 했지만, 상류층 여성들은 가체를 사용해 얹은머리를 크게 했다. 신윤복(1758〜?)의 대표작인 미인도 속 주인공 여성도 얹은머리를 하고 있다.
가발을 수출하던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과 숱이 적은 남자들을 위해 혹은 신분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던 가발은 1950년대 이후 합성섬유로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과거 가난한 집의 여성들은 머리를 잘라서 팔아 굶주림을 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자연 모발로 만든 가발은 크게 줄어 들었다. 가발은 한때 고가의 사치품이었기에 나라에서 직접 사용을 제한할 정도였지만, 현재는 가격이 떨어지면서 1960년대 이후에는 가발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가발은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으로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던 물건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 임명미, [한국의 복식문화], 경춘사, 1996;조효순, [한국복식풍속사연구], 일지사, 1988; 석주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92.
[네이버 지식백과] 가발 - 사치의 대상으로 지목, 가체 금지령을 내려라 (한국의 생활사, 김용만)
가발의 역사가 참 깊죠. 하나 배우고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