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길다"에서 "깁니다"를 "기다"에서도 "깁니다"로 어휘를 파생시킬 수가 있다. 하지만 양자의 의미는 아주 다르다. 전자는 길고 짧음을 뜻하는 "깁니다"이고 후자는 엎드려서 바닥을 기어간다는 의미의 "깁니다"이다. 발음할 때는 그냥 "김니다"라고 해도 무방하다.
중학교 2학년 때이다. 나는 이 "깁니다" 때문에 지금 생각해도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을 당한 적이 있다. 내 고향(문경지방)에서는 "깁니다"가 짧음에 반대되는 의미에서나 바닥을 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도 쓰이고 있으니 이 향토적이고 사투리적 의미 때문에 전혀 뜻밖의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5월쯤 되는 나른한 오후 5교시 수업인 농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담임 선생님이시자 처음 우리 학교에 농업담당 교사로 부임하신 이경서 선생님의 시간이기도 했다. 당시 교과 내용은 오래되어 확실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원예와 관련된 것으로써 아마 삽목(꺾꽂이)인 듯 하다. 선생님은 그 날 따라 수업 도중에 가르친 내용을 선생님 스스로 묻고 답하면서 임의로 아무 학생이나 지적하여 자신이 말한 내용에 대해서 그 진위를 묻는 이른바 오·엑스(OX)식 평가를 했던 것이다. 급우들은 정답을 알든 모르든 내심은 선생님이 지목하는 그 임의의 지적대상으로 재수 없게 걸려 들지 않기를 한결같이 바라고 있었는데 일진이 사나와서 인지 서너 번째쯤으로 내가 걸 려들었다.
"장터껄, 일어서"
"예"
"종자를 파종 후에 발아가 잘 되게 하는 발아제로 쓰이는 것으로 지베렐린은 쓰지만 콜히친은 쓰지 않는다. 맞냐? 틀리냐?"
"....."
"빨리 대답해 봐."
나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어떨 결에 얼른 대답을 했다.
"예, 깁니다."
"뭐야? 긴다고?"
"....."
순간 나는 내가 대답한 것이 틀렸나 싶어 불안한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답은 맞는 것 같았다. 지베렐린은 식물이 발아가 잘 되게 하는 발아제나 성장제로 쓰지만 콜히친은 콜히쿰이라는 열대성 식물에서 얻어내는 물질로 염색체 수를 4배체로 만들기 때문에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데 쓰이는 물질로 배웠기 때문이다.
"선생님 지베렐린은 발아제지만 콜히친은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것으로..... 선생님 말씀이 오(O)입니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야 임마, 맞기는 누가 맞아? 너는 긴다고 했잖아"
선생님은 당시 총각 선생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40대 중년처럼 너털웃음을 크게 웃었다. 급우들도 선생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간파했는지 와아 - 하고 웃었다. 곤혹스러운 건 나 혼자 뿐이었다. 사면초가가 아니라 팔면초가였다.
"선생님, 제가 '깁니다'라고 한 것은 '옳다' '맞다'라는 뜻입니다. 제가 사투리를 써서 그만 ....."
쑥스러워서 뒤통수까지 긁어가며 딴에는 조리를 세워 항변을 해 보았지만 선생님은 무슨 작심을 하셨는지 막무가내였다. 아무래도 이걸 핑계 삼아서 5교시 수업이라 모두들 나른도 하고 수업시간도 끝 무렵이라 교실 분위기를 쇄신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아니야, 너는 '맞다'고 한기 아니라 분명히 '깁니다'라고 했으니 한 번 기어봐라."
"....."
"빨리 기어 보라니까"
"아입니다. 선생님요. 그기 아이고 ...."
"아이긴 뭐가 아이야. 긴다고 했잖아 이놈아야"
나는 나의 대답이 진위임을 확신하고 있었는지라 하등의 기어야할 이유가 없어서 계속 버텼다. 선생님은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너 긴다고 해 놓고 안길래?"
"선생님 제가 긴다는 것이 아이고요. 선생님 말씀이 맞다 이깁니다."
"아니야 너는 긴다고 했으니 기어야 돼"
참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냥 "맞습니다" 하면 될 것을 괜히 "깁니다"라고 해 가지고 이 고생을 하나 생각하니 후회도 되고 급우들도 항변을 해 주기는커녕 시간이나 때우자는 식으로 재미있어하고 있으니 목마른 놈은 나뿐이었다. 속으로 아무래도 이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겠다 싶어 '그래 기왕 광대가 될 바에야 철저한 광대로 변하자.' 고 작심을 했다.
"선생님"
"왜?"
"선생님 만약 ..... 이건 만약인데 말입니다."
"....."
"말해 봐. 더듬지 말고"
"예, 만일 제가 '맞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해도 선생님은 혹시 저를 때리려고 하신 것 아닙니까?"
"뭐라고?"
"예, 지 말은 말입니다.... '맞습니다'는 답이 '맞다'는 뜻도 있지만 '매를 맞는다'는 뜻도 되니까 말입니다 ....."
"그래, 그야 그렇지."
"생각해보니까 제가 '맞습니다'라고 했어도 선생님이 아무래도 ....."
이 대거리의 마지막 숨긴 말의 의미를 모를 급우는 한 놈도 없었으니 교실은 다시 폭소의 바다로 변했고 선생님도 내 항변이 그럴 듯 했는지 잔잔한 미소까지 띠셨다. 그래서 이제 이 숨막히는 상황을 벗어나려나 하고 약간 안도를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집요했다. 갑자기 미소도 거두시고 근엄한 표정으로 내게로 다가오더니
"아니야, 그래도 넌 니가 스스로 긴다고 했으니 기어야 해."
나도 질 수가 없어 계속해서 버텼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 엉덩이를 슬쩍 꼬집었다.
"너 정말 안 길 거야?"
그리 세게 꼬집은게 아니라서 아프지가 않아 그냥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꿈쩍도 하지 않자 선생님은 약이 오르시는지 더 세게 꼬집었다.
"어 - 이놈 봐라. 꼬잡히지가 않네"
나도 은근히 오기가 나서 선생님의 꼬집는 강도에 맞춰 대둔근에 불끈 힘을 주어 버티었다. 당시에 어른이라 해도 웬만한 힘으로는 잘 꼬집혀 지지가 않는 나의 대둔근은 꽤 탄탄했다. 왜냐하면 한 달에 400원 정도하는 기차 삯(당시 역에서는 기차정기통학권을 학생들에게 1개월권이나 3개월권으로 판매했음)을 아끼려고 매일 20여리(8킬로 이상)길을 도보로 다녔기 때문에 다리와 엉덩이 근육이 어지간이 단련이 되었던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고추 팔고 마늘 팔고 보리를 팔아서 어렵게 공부시키던 시절이라 도보로 통학하는 학생들은 거의가 다 그랬다. 이런 이유로 단단한 내 엉덩이 살을 꼬집으려고 하니 선생님은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어 - 이놈 봐라. 이거 말궁디(말엉덩이) 아이나."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에 교실 안은 다시 폭소를 넘어 자지러짐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그럴수록 나의 오기도 더 높아만 가서 엉덩이 근육에 힘을 더 강하게 주었다. 그러자 선생님도 훈장으로서의 체면과 오기가 발동하시는 모양이었다.
"야- 아무래도 안되겠다..... 너 기어야겠다."
당시에 선생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버금가는지라 웬만하면 나도 눈 질끈 감고 선생님의 농담을 받아들여 교실 바닥에 엎드리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상당한 이유 없이 기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꼴에 자존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후회가 되었다. 그냥 꼬집혀 주면서 아픈 척이나 할걸.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는 불가항력적이라 교실 바닥에 엎드려 기는 시늉을 했다.
"일어나!"
선생님도 너무하다 싶었는지 금방 일어나라고 했다.
"장터껄"
"예 -"
"내가 너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니 대답이 틀려서도 아이고 ..... 사투리를 쓰지 마라. 나도 쓰지만 .... 수업시간에는 .... 자리에 가서 앉아"
이 때 5교시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우리는 벨소리가 아니고 사환 아이인 이쁜이가 땡땡땡 치는 종소리였다) 자리에 가서 앉자. 나는 억울하고 분해서 눈두덩이 붉어졌다. 기었다고 분한 게 아니라 나는 분명하게 답을 맞췄고, 사투리적 의미지만 그 말뜻을 알고 있음에도 기어코 나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간 선생님이 야속하고 아무 소득 없는 내 어릿광대 놀음이 분해서였다.
이경서 선생님 -
경북 김천이 고향으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대를 갓 졸업하고 첫 부임지로 온 곳이 바로 우리 문경중학교였다. 약간 싱겁게 보이는 훤칠한 키에 마른 몸집. 걸을 때는 약간의 안으로 휘어진 오(O)다리 때문에 건들거리는 모습이 다소 건달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햇빛에 보면 약간 노랗게 보이는 머리칼이며 언제나 술을 마신 듯 붉으스레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얼굴을 가진 미남자이셨다. 선생은 부임하면서 우리 2학년 6반 담임을 맡으셨다.
우리 2학년 6반 급우들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당시 젊은 선생님이셨지만 상당히 자상한 면도 있으셨고 소탈하면서도 엄격하고 무서운 부분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깁니다" 사건 이후 두어 달이 지난 후 나의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아신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교무실로 불러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학비를 일부 면제시켜주시려고 애쓰시든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또 선생님은 담당이 농업과목인 만큼 학교 온실 화초에 남다른 열과 성의를 다하셨는데 화초를 돌보실 때에는 언제나 맥고자를 쓰시고 진짜 농부처럼 일했다. 토요일이면 오후에 늘 본가가 있는 김천 농장으로 가시든 모습도 기억된다. 효자이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2학년 6반 급우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건 아무래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고 났을 때 농기구실로 끌려가 엄청난 취조를 당한 기억일 것이다. 농기구실은 권위주의 시절 소문으로 듣던 안기부 남산 대공 분소 취조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선생님은 우리 2학년 6반 담임을 맡은 3월초에 급우들을 농기구실로 한 사람씩 불러 성적의 평균목표 점수를 스스로 정하게 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혼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급우들은 으레 학기초니까 선생님이 그러는 것이려니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1학기 중간고사를 치고 나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우리는 시험만 치면 늘 공포에 떨었다. 우리는 멍청하게도 대부분이 자신의 능력보다는 목표점수를 높게 정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평균 1점 미달에 1대, 전회 시험보다 평균 1점이 하락하면 덤으로 1점에 2대씩 보태 엉덩이에 물리적 고통을 가했는데 그 매의 횟수는 양적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강도였다.
성적 미달 추궁에 대한 취조 장소로 쓰인 농기구실은 언덕아래에서 2층으로 지어 1층은 농기구실로, 2층은 도서실로 사용하였는데 2층인 도서실은 언덕에서 보면 1층처럼 보였다. 농기구실 출입문은 함석으로 만들어져 자주 드나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늘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고 조명시설이래야 20∼30촉 짜리 알전구 몇 개뿐이었다. 그래서 농기구실 안은 컴컴했고 벽 쪽에는 쇠스랑, 삽, 괭이, 밧줄, 낫 등과 거름이나 흙을 퍼 담아 나르는 담가(당까라고 했는데 그건 틀린 용어다), 곡괭이가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늘 부러진 5파운드 곡괭이 자루나 괭이나 삽 자루가 널부러져 있어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으스스한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선생님은 시험결과가 나오면 방과 후에 우리를 10명이나 15명 단위로 농기구실 앞으로 집합을 시켰다. 농기구실 안에는 낡았지만 큼직한 책상이 있고 선생님은 이 책상에 앉아서 출석 번호순으로 한 명씩 호출하여 성적에 대한 전말을 평가했다. 우리는 엉덩이에 몇 대씩의 고통을 당하지 않고는 농기구실 밖을 나오지 못했다. 차라리 맞는 편은 덜했다. 농기구실 밖에서 순서를 기다리는게 더 고통스러웠다. 문틈을 통해 치도곤을 당하는 급우의 비명소리가 더 공포스럽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순서가 되어 농기구실 안을 들어가면 선생님은 책상에 5파운드 곡괭이 자루를 책상에 걸쳐놓고 도수가 높은 안경 너머로 일단 쓸어보고 나서 낮으며 묵직하게 심문을 했다.
"이번 성적이 목표에 미달되었나? 목표달성을 했나?"
대충은 성적결과를 아는지라 우리는 대부분 그저 뒤통수만 긁을 뿐인데 선생은 5파운드 곡괭이 자루를 들어 바닥에 한 번 '쾅' 내려치시며 으름장을 놓곤 했다.
"빨리 말해 보란 말이야?"
이쯤 되면 넓은 농기구실은 작게 말해도 찌렁찌렁 반사음이 울려서 주눅이 들게 마련인데 윙윙거리는 메아리성 때문에 공포감은 극도에 달한다. 그저 벌벌 떨릴 뿐이었다.
"자 - 약속대로 맞아야겠다. 예외는 없다."
그 다음 순서는 5파운드 곡괭이 자루가 엉덩이에 충격을 가하는 순서다. 강도가 너무 세서 웬만해선 비명을 안지를 수가 없다. 이 비명소리는 함석 문을 통해 밖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급우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듣는 친구들도 안절부절 같이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서 반드시 목표 달성해."
이렇게 말씀하시며 성적표를 내 주시면 고통의 시간은 끝나고 해방의 시간이다. 함석 문을 열고 나오면 기다리는 친구들의 부러운 눈치를 받는다. 바로 다음 순서인 급우는 낯빛이 흙빛이다. "매도 맞으려면 먼저 맞아라"는 우리 속담이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이렇게 했다면 선생님이 제대로 자기 자리를 지켰을지 의심이 가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 당시 맞아서 크게 다치거나 다음 날 학교에 못 올 정도로 된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우리는 스스로 공부를 못해서 맞았기 때문에 부모님들에게 그렇게 호되게 맞았다는 사실을 입도 뻥끗 해보지 못했다. 순진하게도 그걸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한 까닭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이렇게 가끔 우리들에게 무섭게 보였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농담도 잘하시고 부드럽고 쾌활하셨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포내 뒷산으로 봄 소풍을 갔을 때의 일이다. 예전에는 소풍을 가면 반 대항으로 씨름도 하고, 장기자랑(주로 노래나 만담, 뱀장수 흉내)도 하고, 선생님들의 장기자랑도 보는 시간을 가지며 하루를 보냈는데 이경서 선생님의 장기는 곱사등이 춤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이상한 춤사위였다. 여기에는 꼭 자신의 신세 타령 비슷한 타령이 뒤따랐다.
"저 건너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지만, 장개(장가) 못간 이 선생은 비겔(베개를) 안고 돈다."
이런 타령을 읊으면서 엉거주춤 앉아서 빙글빙글 돌면서 여자들이 수건으로 목욕하는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 선생님이 개발했던 춤사위인데 배꼽이 빠질 만큼 재미있었다. 물론 타령은 다음 부분도 있지만 기억이 안 난다.
작년 8월 15일 중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동창회 체육대회에 가 보았다. 중학교 2학년 때 급우였고 지금은 고향의 중학교에서 수학 선생으로 교편을 잡고 있는 청송(靑松) 김병덕 선생을 만났다. 우리는 오랜 만의 해후여서 서로는 반갑게 인사 나눴다. 청송은 얘기도중에 이제 30년이 다 되어 가는 "깁니다" 사건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좀 쑥스러웠지만 그의 놀라운 기억에 감탄을 했고, 둘 이는 그 시절로 돌아가 희희낙낙 했다. 그 만큼 "깁니다" 사건은 급우들에게는 재미가 있었고 인상이 깊었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청송 선생, 난 그날 이후로 '깁니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네."
"맞아, 그 때 우리 담임인 이경서 선생님이 너무 했지. 그냥 넘어가도 되는데 .... 하지만 선생님은 몇 년 전에 돌아 가셨어."
"뭐라고? 돌아가셨다니! 왜?"
"평소 약주를 즐기셨나 보이. 간경화로 돌아가셨다고 누가 그러더군!"
순간 내 잘 못도 아닌데 아린 아픔 같은 것이 가슴에 치밀어 올라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승과 저승의 괴리가 멀다고 하지만 별로 멀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야, 이놈아 기어봐" 할 것만 같았다.
"자네 혹시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
"...."
"그래, 그런 우울한 얘기는 그만 하고 우리 술이나 한 잔 드세 ....."
하지만 술 잔에 선생의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아 술이 잘 넘어가지 않아 술잔만 들었다 놓았다 할 뿐이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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