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색다른 통장이 하나 있습니다.
이 통장은 비밀 번호도 없고,
도장도 필요 없습니다.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누가 가져가도 좋습니다.
아무리 찾아 써도 예금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찾아서도 늘어나고
새로 넣어도 늘어납니다.
예금을 인출하기도 쉽습니다.
은행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한 밤중에 자리에 누워서도 찾아
쓸 수 있습니다.
이 통장은 '추억통장'입니다.
통장에는 저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빼곡이
들어 있습니다.
더러는 아픈 추억도 있지만 그 아픔이
약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가끔 이 통장에서 추억을 꺼내
사용합니다.
꺼낼 때마다 행복도
함께 따라나옵니다.
소등을 타고 산길을 오르던 일,
가재를 산 채로 깨물어 먹으면 눈이
맑아진다는 친구의 말을 믿고
살아 있는 가재를 입안에 넣었다가
날카로운 집게에
혀를 물렸던 일,
소나기가 쏟아지는
신작로를 토란잎 우산 받쳐들고 뛰던 일,
모깃불 피워놓고 멍석에
누워 쏟아질 듯
빽빽한 밤하늘의 별을 세던 일,
가난한 신혼 살림 단칸방에서
비만 오면 스물 다섯 군데
구멍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을 받으려고 장종지 하나까지
모조리 동원했던 일,
연탄 가스로 천국 입구까지
몇 번을 갔다가 다음에 오라고 해서
되돌아왔던 일들,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었던
많은 얼굴들 …….
오늘도 추억 통장을 열고 추억 몇 개를
꺼내봅니다.
그리고 여기에 꺼내놓았습니다.
이 은행은 행복을 주는 은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