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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박물관 | ||||||||||||||||||||
1980년 광주 취재기(1980. 5.27∼30) 광주 | 2012.01.19 | 조회 19,657 | 추천 109 댓글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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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충장로에 있는 한 공중전화박스 유리창에도 총알이 뚫고 지나갔다.. 글 : 김녕만 그해 봄, 넋을 잃을 만큼 참혹하고 엄청난 사건을 취재한 이후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믿어왔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광주항쟁에 관한 사진 집을 내고 그 취재기를 쓰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오히려 그 시기는 나의 예상보다 빨리 온 것 같다. 물론 지나간 세월이 짧아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날의 아픔을 거짓 없는 사진으로 들추어 내보이기에는 그날의 상처가 너무나 깊고 참담하여, 그간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망설여진다는 뜻에서다. 그만큼 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짓고 내 사진에 비친 사람들이 더 이상 폭도로 몰려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그 동안 미뤄온 숙제를 해결 때가 왔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렷하게 얼굴이 직한 계엄군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들은 우리가 생전 만날 일이 없는 적군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총을 들고 명령을 수행한 나의 사진 속 군인도 지금쯤 광주항쟁의 상처를 달래며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가능하면 군인들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그날의 비극이 가슴아팠다. 그리고 정작 '진실을 만천하에 알려야 했던 절박한 그 순간'에 기자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아울러 이 사진 속의 주인공들이 애써 잊고자 하는 슬픔을 행여 새롭게 일깨우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14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사진집을 내는 마음속에 머뭇거림이 남아있다. 1980년 봄,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마 재채기부터 할지 모르겠다. 최루탄가스가 안개처럼 뿌옇게 시야를 가리던 서울, 내일을 예측키 어려운 정치상황 속에서 마치 누군가의 희생을 기다리듯 분노와 체념 무기력 등과 좌절감, 절망과 암담함이 뒤범벅된 그런 분위기였다. 그해 5월, 방독면을 쓰고 살다시피 하며 데모취재를 하던 나는 신문사 입사2년이 채 못된 초년병에 불과했다. 광주사태가 발발한 몇 일 뒤, 광화문을 지나다가 대학 은사인 임응식 교수님을 뵙게 되었다. 교수님은 대뜸 "자네 신문기자가 광주에 안가고 왜 여기에서 돌아다니는가? 사직기자가 사건 현장에 있지 않고 뭘 하는 겐가?"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본인이 가고 싶다고 하여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닌 신문사 생리를 설명드릴 수 없어 우물쭈물하고 말았다. 광주에는 이미 황종건선배가 내려가 있었다. 그러나 광주와는 통신두절이었고 신문사내에서도 광주에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는 있으되 정확한 전모는 파악되지 못한 채 모두들 초조해하고 있는 판이었다. 광주사건에 대하여 제대로 신문에 보도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23일, 용케도 사회부기자가 광주를 빠져나와 신문사로 돌아왔다. 경상도 출신인 그는 혼자만 올라온 것이 미안했는지 "거기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다가는 큰일난다"는 말을 했다. "그래? 그럼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김녕만씨가 내려가야겠구만." 이것이 5월24일, 내가 광주출장을 떠나게 된 동기였다. 전라도 사투리 덕분에 적임자로 뽑히게 된 것이다. 가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것처럼, 가기 싫다고 해서 또한 안 갈 수도 없는 것이 기자의 숙명이다.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뒤숭숭하고 심란한 소문만 무성한채 황선배와는 연락두절로 광주시내 어디에 가서 합류해야 될지. 게다가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교통편도 없으니 어떻게 광주시내로 들어가야 할지 도무지 막막하고 불안했다. 광주에 가기 전 고향인 전북 고창으로 먼저 가서 어머님을 뵌 것도 혹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비장함 때문이었다. 고기를 사들고 어머니를 찾아가 그날밤 어머니 손을 잡고 선잠을 잤다. 그리곤 다음날 아침 "차라리 신문사를 그만두더라도 광주에는 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걱정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형님이 택시를 대절해서 송정리까지 바래다주었다. 거기에서 광주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1980년 5월 27일, 앳된 모습이 역력한 고교생. 광주를 경계로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하고 있는 이른바 비무장지대를 카메라가방을 메고 혼자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슬프게도 기자를 보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인은 군인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기자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 글쓰는 기자야 얼마든지 신분을 위장할 수 있지만 사진기자는 카메라가 있기 때문에 금방 기자임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다행히 송정리에서는 광주와 통화가 가능해 당시 광주주재기자이던 신광연 선배의 마중을 받게 되었다. 신선배 댁은 송정리에서 가까운 거리여서 일단 그 댁에 들렀다. 신선배는 카메라를 집에 두고 도청 쪽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러나 카메라 없는 사진기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방은 임시로 맡기되 카메라 한 대를 분해하여 서류봉투에 넣어 가지고 신선배를 따라 무사히 시내 중심가에 잠입(?)할 수 있었다. 광주에서 만난 황선배의 첫마디는 "여기서 섣불리 사진기 들이대다간 큰일나니깐 절대로 사진 찍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이미 숨어서 기록해 놓았으니 일단 분위기 파악부터 하고 무엇보다 몸조심하라는 충고를 거듭했다. 그 말을 하는 황선배는 1주일만에 딴 얼굴이 되어 있었다. 넋이 나간 표정에 텁수룩한 수염과 초췌한 모습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사선을 넘나든 사람 같았다. 황선배의 충고를 받아들여 일단 시내 정찰부터 나섰다. 5월25일 상황은 한바탕 공방전을 치른 뒤, 계엄군이 일단 광주 외곽으로 물러나 있고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 한편으로 협상을 시도하면서 또한 만약의 경우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민주수호 시민궐기대회를 갖고 있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공포감이 깔려있었지만 용기 있는 젊음은 그 공포감을 넘어 희망을 버리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도청 근처 전일빌딩 앞을 지나는데 대학생들이 외국신문에 보도된 광주항쟁기사를 벽에 붙여놓고 시민들에게 번역을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외국신문들은 이렇게 보도하는데 한국기자들은 다 뭐하는 겁니까? 한국 기자들을 타도합시다!"하니까 모여 섰던 사람들이 '옳소'하며 동조했다. 슬며시 그 자리를 피해 나오며 황선배의 충고를 떠올리는 한편 무력한 자신에 비애를 느꼈다.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는 수많은 광주 항쟁 희생자들(27일). 당시 우리 기자들에겐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기록용'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신문에 싣지도 못할 취재를 해오라고 지시하는 게 미안한지 데스크는 "기록용으로라도 보관하게 취재해오라"고 지시했고, 기자 역시 신문에 실리지 못할 것을 뻔히 알지만 '기록용'이라는 작은 명분을 갖고 취재에 임했다. 물리적인 강압에 의해 언론의 구실을, 기자로서의 사명을 실천하고 있진 못하지만 기록용으로라도 꼭 사진을 찍어두어야 한다고 나 혼자 중얼거렸다. 비록 광주시민에게 배척 당하고 있는 무기력한 한국기자지만 기록해야 되리라, 내일을 위하여, 오늘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은 아니므로 오늘은 금방 어제가 되고 내일은 또한 오늘이 된다. 그때, 그날을 위해 오늘은 기록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벙어리 노릇을 하고 있지만 아마 언젠가는 말문이 트일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준비해야만 한다. 우리의 현대사가 격동의 세월이었음에도 6.25, 5.16, 부마사태, 12.12사건 등 우리 손으로 기록되어 제대로 알려진 사진이 거의 드물다는 뼈아픈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늘의 기록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각오를 했다. 광주가 시민군에게 장악된 이후부터 외신기자들은 학생들로부터 대우를 받으면서 마음껏 취재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 기자가 과연 얼마나 애정을 갖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리고 이들이 취재한 필름이 모두 외국에 있는 소속회사로 들어간 뒤 누가 관심을 갖고 이 필름들을 정리해서 훗날 광주의 진실을 전해줄 것인가. 비록 한국기자가 냉대는 받고 있지만 우리의 기록을 우리의 손으로 해야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26일,계엄군과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내일 새벽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자 일순 광주의 분위기는 냉각되었다. '도청을 사수하기 위해 기자들을 인질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아 기자들 역시 몸조심하기에 바빴다. 밤이 깊어가면서 적막감과 함께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어떤 예감,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아마 모두들 같은 심정인지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새벽4시경이나 되었을까. 총소리를 왜 콩볶는 소리라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바람을 가르는 총알소리는 왜 그리도 불길한지. 더구나 군대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집중사격소리가 여름날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보다 더 무섭고 섬뜩했다. 금방 총알이 창을 뚫고 날아와 내 심장에 박힐 것만 같았다. 격전을 말해주는 잔해들. 시민군들이 쓰던 차량과 물건들이 부서진채 도청마당에 널려있다(27일). 광주의 5월27일은 그렇게 총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뜬눈으로 새벽을 기다린 후 날이 밝자 숙소를 나섰다. 광주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주검이 나뒹굴고 많은 젊은이들이 굴비처럼 줄줄이 포박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지만 무언가 해야 된다는 절박감에 도청 앞으로 나갔다. 시민군의 본거지였던 도청을 장악한 계엄군이 출입을 금하고 있어 취재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정문을 지키고 있다가 대령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찾아갔다. 대령수준이라면 아무리 살벌한 분위기라도 말이 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든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나의 절절한 요구가 통했는지 그 대령은 도청취재를 허락했다. 한국기자중 유일하게 도청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무서움도 잊은 채 도청 안에 나뒹구는 시체와 줄줄이 묶인 채 땅바닥에 엎드려있는 젊은이들을 촬영했다. 그때 한 대위가 다가오더니 "이거 뭐야? 어떻게 들어와서 사진을 찍는 거야"라고 고함을 질렀다. 내가 대령이 들여보내 주었다고 말하자, "거짓말하지 말라"며 도청 밖으로 밀어냈다. 도청 밖으로 나오자 여기저기에서 붙잡혀 오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줄줄이 포박된 채 걸어오는가 하면, 트럭에 실려오기도 했다. 마치 적국의 패잔병처럼 끌려오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착잡하고 안타까웠다. 이것으로써 광주민중항쟁은 일단락 되었지만 그 후유증이 얼마나 클 것인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27일과 28일 이틀동안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과 허망하게 쓰러진 젊은이들의 죽음을 취재하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광주의 한을 기록하기 위해 애를 쓰는 나를 보고 타사 선배기자들이 한마디씩 해댔다. "작품찍냐? 사건을 다 끝났는데 웬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어대? 아예 영화를 찍어라." 물론 그 순간에 사진집을 낸다던가 할 요량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밤중에 벌어진 일이라 총격전을 촬영할 순 없었지만 그 뒤를 기록하는 일이라고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을 잃은 흰머리 처연한 할머니, 딸을 잃은 어머니의 통곡, 아버지를 잃은 어린이의 눈물, 남편을 일고 눈물조차 메마른 젊은 아낙의 표정...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 사진들만으로도 광주의 비극이 어떠했는지. 왜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이 땅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29일에는 망월동에서 벌어진 합동장례식을 취재했다. 그리고 그 후 몇 일간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아 가는 광주의 모습을 마무리 취재 한 뒤 열흘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회사에 출근해보니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아야 보도되는 상황에서 내가 취재한 사진중에는 뒷면에 '不可'라는 계엄사령부 검열관의 판정이 내려져 있기도 하고 '시민군'을 '폭도'라고 사진설명에 명시해야 게재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가 하면 어떤 사진은 군인이 나오지 않게 일부분만 트리핑하여 사용하라는 등 지독한 검열이 있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사진을 안 쓸망정 폭도라는 사진설명을 붙일 수 없다 하여, 결국은 사진을 싣지 않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 후 오랫동안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사항이 돼버린 세월이었다. 그러나 나는 광주민중항쟁 취재 이후 광주담당기자처럼 인식되어 5월이 되면 망월동을 취재하러가곤 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다. 불에 덴 사람이 불의 무서움을 잊어버리면 또다시 화상을 입기 쉽듯이 기억상실증은 결국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시킨다. 그리고 이 기억상실증에 분명 한몫을 한 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명을 다하지 못한 저널리스트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딸 박금희(전남여상3)의 관을 부둥켜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29일). 상기해야 할 것이 비단 6.25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역사속 그 많은 상처와 흠집들을 낱낱이 기억해야만 더 이상 어리석음은 되풀이되지 않고 마침내 비극의 역사는 끝날 것이다. 잊지 말고 기억할 때 주의 비극 역시 끝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제 제대로 기억함으로써 광주에서의 숱한 죽음에 생명을 주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속 한을 풀어주어야 할 것이다. 광주민주항쟁이 한 지역의 아픔이 아닌, 진실로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또다시 이런 어둠의 시대를 맞지 않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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