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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 ||||||
괴산 산막이마을과 갈론마을-오지 캠핑- 대세 | 2011.05.21 | 조회 12,376 | 추천 10 댓글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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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산막이마을과 갈론마을은 지척입니다. 그런데 왕래는 쉽지 않습니다. 달천을 사이에 두고 길은 산을 에둘러 지납니다. 산막이를 비롯해 갈론리, 외사리, 학동리, 사은리가 ‘비학봉마을’로 통하지만 강은 마을을 나누고 시간을 쪼갭니다. 산막이마을에 다다르려면 배를 타든지 1시간 가량 옛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길이 닿지 않는 마을을 찾아 오지캠핑을 떠납니다.
귀양살이를 하던 곳, 산막이마을
적소(謫所). ‘귀양살이를 하는 곳’이라는 뜻이죠. 산막이마을의 시작은 노수신 선생의 적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중기 학자인 노수신(1515~1590)은 을사사화에 휘말려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고난의 세월을 견뎌 훗날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가 귀양살이를 했던 산막이마을은 ‘죄인’이 머물러야 할 만큼 수백년 전부터 오지로 기록됐습니다.
산막이마을이 다시 역사 위로 올라온 것은 노수신의 10대손인 노성도라는 선비 덕분입니다. 선조의 자취를 따라 산막이마을을 찾은 노성도는 마을을 둘러싼 달천의 비경에 반해 ‘연하구곡’이라 이름 짓고 ‘신선의 별장’이라 칭했습니다. 노수신 선생의 적소와 그의 삶을 기리는 ‘수월정’은 산막이마을 안쪽에 남아있습니다. 1950년대 괴산댐이 생기면서 수월정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그대로 마을 위쪽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산막이마을은 이름 그대로 ‘산이 막아섰다’는 뜻입니다. 괴산댐이 생기기 전만 해도 마을 앞 달천은 수위가 낮았습니다. 돌다리나 섶다리를 놓고 마을 간 왕래를 할 수 있었죠. 그러나 괴산댐이 생기면서 달천은 물이 불어났습니다. 거대한 호수를 이뤄 ‘괴산호’라 부르게 됐죠. 노성도가 칭송하던 연하구곡은 물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산막이로 통하던 길도 함께 묻혔죠. 주민들은 나룻배를 타고 바깥마을과 소통했습니다. 그도 여의치 않아 산에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내 50여년을 오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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