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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 김치 습격에 “무·배추 농사 잘 돼도 남는 건 빚뿐”
어푸 | 2019.09.10 | 조회 345 | 추천 0 댓글 0

지난 4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의 한 배추밭. 10여 명의 일꾼이 비를 맞으며 배추를 수확하고 있었다. 일꾼들은 배추 3포기를 망 하나에 담은 뒤 철로 된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았다. 배추가 가득 실리자 굴삭기가 바구니를 들어 5t 트럭으로 옮겼다. 이 밭을 빌려 배추 농사를 짓는 박모(40)씨는 “요즘같이 배춧값이 폭락했을 땐 비가 많이 내려 물량이 없을 때 출하해야 그나마 한 망에 1만원 정도 받을 수 있다”며 “그동안은 상태가 좋은 배추도 6000~8000원대를 받아 손해가 크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 밭을 3.3㎡(1평)당 1만3000원에 빌려 배추를 기르고 판매한다. 땅 주인은 배추 파종만 하고 나머지 일은 박씨가 일꾼을 구해 한다. 농약 살포 등 밭을 관리하려면 평당 3000원의 추가 비용을 더해 1만6000원이 들어간다. 박씨는 “수확 때 1평당 배추가 10포기 정도가 나오는데, 배추 3포기가 담긴 망하나에 1만원을 받으면 평당 3만원을 번다”면서도 “인건비와 운임비, 수수료를 떼고 나면 사실상 남는 게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중앙일보

지난 4일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한 다리 밑에서 농민들이 수확한 고랭지 무를 박스에 담고 있다. 이들은 박스가 비에 젖지 않도록 2㎞가량 떨어진 밭의 무를 트랙터로 옮겨왔다. 박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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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비 오는 날 출하

고랭지 무로 유명한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도 무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날 찾은 횡계리 한 다리 밑에서는 수확한 고랭지 무를 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들은 2㎞가량 떨어진 밭에서 트랙터로 옮겨온 무를 박스에 담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강모(58)씨는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가야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다”며 “20㎏ 한 박스 기준 1만5000원은 받아야 유지가 가능한데 그동안은 계속 생산원가 이하로 받아왔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연도별 김치 수입 현황.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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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만난 농민과 산지유통인 등은 배추와 뭇값 폭락의 주요 원인으로 중국산 김치 수입 급증을 꼽았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2009년 14만8124t이던 김치 수입 물량은 매년 꾸준히 증가해 지난해 29만742t으로 두배가량 급증했다. 이 중 3t가량을 제외한 29만739t이 중국산 김치다.

농민 정모(74)씨는 “중국산 김치가 국산 김치의 3분의 1 가격이니 죽어라 농사지어봐야 경쟁이 안된다”며 “인건비에 박스값, 운임 등 비용을 빼면 3~4억원씩 빚을 질 수밖에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농가에 잔금 못 치르고 생활고 겪기도

한국농업유통법인 중앙연합회에 따르면 올 들어 산지유통인 5명이 무와 배추 가격 약세로 빚에 허덕이다 목숨을 끊었다. ‘산지유통인’은 남의 땅을 빌려 배추나 무를 키운 후 판매하거나, 농민들이 키운 농산물을 사들여 시중에 공급하는 사람을 말한다.

지난 7월 29일 농업유통법인을 40년간 운영한 신모(66)씨가 충북농산물도매시장 내 자신의 사무실에서 목을 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신씨는 8월 중순 출하예정인 고랭지 무와 배추 17만9000㎡를 매수하고 계약금으로 3억원 정도를 농가에 지급했다. 그러나 무·배추 가격 폭락으로 잔금을 치를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랭지 무와 배추 재배와 함께 산지유통인 일을 해 온 김모(62)씨도 지난 6월 20일 강원도 정선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김씨는 정선과 영월·태백·평창 등에서 계약재배 등으로 33만㎡ 넘는 밭에서 무와 배추를 재배하고 유통하는 일 등을 해왔다. 김씨의 동생(56)은 “(형이)3년 전부터 큰 손해를 보기 시작해 빚만 10억원에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남는 게 없는 데다 생활고까지 겪으면서 삶의 회의를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산지유통인의 극단적인 선택이 이어지는 원인을 열악한 생산 조건으로 보고 있다. 김치의 주재료인 고랭지 배추와 무 농업은 해발 600~1000m 이상 산지 비탈길에서 이뤄진다. 60~70대 고령의 농가들이 파종부터 출하까지 모든 과정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산지유통인과 거래하면 농가는 파종까지만 맡고 비료, 농약, 상·하차 등 생산비용을 모두 산지유통인이 부담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2018년 농업관측본부 표본농가 조사’에 따르면 고랭지 무·배추 농가 중 69.8%가 산지유통인과 계약 재배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산지유통인이 수익 낼 환경 사라져”

산지유통인은 자신이 아는 유통망을 통해 수확과 판매를 한다. 하지만 중국산 김치의 습격으로 산지유통인이 수익을 낼 수 있는 환경이 사라졌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대한민국김치협회 박윤식 전무는 “수입 김치 때문에 농사를 잘 지어놓고 폐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며 “너무 많은 양이 들어와 산업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안타깝다”라고 지적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최병옥 연구위원은 “개인적인 점조직 위주로 채소를 재배하는 산지유통인들도 정부나 농협과 계약재배를 통해 농산물 가격 안전망 안으로 들어와야 이 같은 피해를 막을 수 있다”며 “규모·조직화한 산지유통인을 활용하면 정부 입장에서도 채소류 수급안정사업에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한 박스에 1만5000원 넘어야 남는데…이 가격 넘긴 날은 단 하루

현장에서 만난 농민과 산지유통인들이 주장하는 고랭지 배추와 무의 손익순기점은 배추 10㎏(3포기) 한 망과 무 20㎏(9~10개) 한 박스 기준 1만5000원 선이다. 이 금액은 파종부터 비료, 농약, 상·하차 등 모든 생산비용을 포함한 것으로 이 정도 가격에는 거래돼야 이익이 남는다고 농민들은 설명했다.

그렇다면 농민과 산지유통인의 손을 거쳐 시장으로 나간 고랭지 배추와 무는 어느 정도의 가격을 받았을까.

서울 가락동시장 대아청과 일일품목별 시세에 따르면 품질이 좋은 상(上)품 기준 배추 가격은 지난달부터 최근까지 주로 6000~9000원 선에서 거래됐다. 하품은 1000~4000원에 팔렸다. 1만5000원이 넘은 건 지난 4일이 처음이다. 이날은 상품이 1만6750원에, 하(下)품은 8100원에 팔렸다. 지난 한 달간 무 가격 역시 주로 6000~1만원대에 거래됐다. 무는 지난 5일 1만5600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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