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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 선생 happykingdoom1004 | 2020.05.05 | 조회 609 | 추천 1 댓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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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어린이의 영원한 벗, 건국훈장 애국장 1990 [ 方定煥 ] 목차- 방정환 - 글을 시작하며소파 방정환은 어린이운동의 창시자, 선구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방정환에 대한 연구는 주로 어린이운동과 문학이라는 측면에 주목한 것이 대부분이고 그의 민족운동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따라서 방정환의 삶을 정리하면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의 삶의 다른 측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야 하며 이 글을 통해 방정환의 삶을 민족운동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해 보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방정환의 출생과 성장을 짧게 살핀 후 그의 민족운동을 청년운동, 3·1운동, 소년운동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민족운동가로서의 그의 삶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천도교의 계대교인이며, 교주 손병희의 사위라는 것만 보아도 그의 삶이 천도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방정환의 활동이 천도교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은 그의 천도교 활동을 전제로 전개하였다. 출생과 성장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음력 10월 7일) 서울의 야주개(지금의 당주동)에서 출생하였다. 족보 및 방정환이 자신에 대해 남긴 기록들을 보면 방정환은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의 방정환은 증조부, 증조모, 조부, 조모, 큰고모, 작은 고모, 삼촌 등과 4대가 함께 거주하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1) 방정환 집안의 성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가 태어났을 무렵 그의 집안은 “장사를 크게 하였고 대단히 큰 기와집을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여서 두 집을 사서 사이를 트고 한 집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는 그의 술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2) 그러나 아홉 살 때에 별안간에 그 큰 집에서 쫓겨3)나면서 몰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세가 기운 이후 방정환의 집은 사직동 도정궁 앞의 초가로 이사했고, 그의 조부와 부친은 권병덕4)의 소개로 인쇄소 직공으로 취직5)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궁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매우 명랑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1908년에 조직된 소년입지회의 활동을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한편 방정환은 5세 때인 1903년부터 7세 때인 1905년까지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는 한편 1905년 두 살 위인 삼촌을 따라 보성소학교에 갔다가 교장 김중환(金重煥)의 눈에 띄어 머리를 깎고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6) 이후 방정환은 1909년 사직동에 위치한 매동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고 사직동에서 근동으로 이사하여 12살 때인 1910년 10월 미동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였으며, 1913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7) 1913년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할아버지의 권유로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은 가난한 방정환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0년 일본 유학을 떠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교수로 재직 중이던 도요대학(東洋大學)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나 학업보다는 천도교 활동에 치중하여 졸업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민족운동에 투신방정환의 민족운동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물론이고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 활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천도교가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었으나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의 활동은 천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 청년운동 방정환이 최초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것은 1908년 조직된 소년입지회를 통해서였다. 방정환의 일생에서 최초의 조직 활동8)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소년입지회는 일종의 토론회로서 8~9명의 회원으로 조직되었다.9) 소년입지회는 점차 규모가 커져서 1910년에는 회원수가 16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방정환은 이 소년입지회의 총대장으로서 훈련원에서 대운동회를 개최하거나 대한문에서 경축행사를 가진 일, 장충단으로의 소풍, 성북동에서의 밤줍기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10) 방정환은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공부에는 뜻이 없었고, 신문화를 흡수하기 위해 독서에 주력하였다. 14살 때인 1914년을 전후로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 『붉은저고리』, 『새별』 등을 탐독하였다.11) 그러던 중 방정환은 졸업을 1년 앞 둔 시기에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였다. 이후 그는 토지조사국에 사자생으로 취직하며, 독학할 것을 결심하였다. 사자생의 임금은 하루에 20전, 한 달에 대략 5원 내외였다.12) 이시기 방정환은 적은 월급으로 인해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17년 그는 권병덕의 중매로 천도교주인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하면서 경제적 곤궁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사회경제적으로도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1918년 7월 7일 방정환은 이중각과 함께 경성청년구락부를 발기, 조직하여 회장 이복원(李復遠), 부회장 이중각(李重珏)을 선출하고, 문예부, 체육부, 음악부를 두었다.13) 경성청년구락부는 방정환이 소년입지회의 활동의 연장선에서 조직된 것으로 판단된다. 소년입지회를 졸업할 정도의 나이인 14세부터의 청소년들로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유광렬은 이 경성청년구락부가 1918년 무렵 회원이 200여명이었다고 증언하였다.14) 이로 보아 방정환은 소년운동단체를 청소년운동단체로까지 확장하여 지속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경성청년구락부는 음악회 개최, 연극 공연, 회원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 등 계몽활동을 주로 전개하는 한편 기관지 성격을 갖는 잡지『신청년』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경성청년구락부의 활동은 1920년대 초 우리 실력양성운동의 흐름과 일치한다. 특히 잡지『신청년』의 발행을 통해 자신들의 논리와 활동을 전파하였다. 한편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지도한 천도교는 3·1운동 이후의 제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문화통치를 선언한 일제의 지배정책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신지식을 수용한 천도교의 젊은 지도층을 중심으로 1919년 9월 2일 경성에서 이돈화, 정도준, 박래홍, 박달성 등이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이하 교리강연부)를 조직하였다. 방정환은 박래홍, 손재기, 이돈화, 황경주, 최혁, 박용회와 함께 간의원으로 선출되어 교리강연부의 지도부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교리강연부는 1920년 4월에는 보다 구체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천도교청년회라 개칭하였다. 천도교청년회는 1920년 6월에는 개벽사를 설립하여 이돈화, 박달성 등이 중심이 되어 월간지 『개벽』을 발간하였다. 방정환도 『개벽』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1년 일본 유학을 위해 동경에 도착한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동경지회는 1921년 1월 10일 발기인 대표 방정환을 비롯하여 김상근, 이기정, 정중섭, 박달성 등이 발기한 후 1월 16일 오후 1시 조도전(早稻田) 학권정(鶴券町) 302호 대선관(大扇舘)에 모이라고 광고하였다. 여기에는 방정환, 김상근, 이기정, 정중섭, 이태운, 박춘섭, 김광현, 박달성 등 10여 명이 모였고, 5~6명은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주소와 성명을 통지하였다. 1921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것을 기념하는 천일기념식을 올리고 오후 3시부터 소석천정(小石川町) 차고 앞에 있는 보정(寶亭) 2층에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발회식이 개최되었다. 보정의 문기둥에는 궁을기가 내걸리고 정면에는 ‘천도교청년회동경지회발회식’이라고 하는 간판이 걸렸다. 회장 방정환의 개회사에 뒤이어 내빈으로는 학우회 회장 김종필, 동우회 회장 김봉익, 동아일보 특파원 민태원, 매일신보 특파원 홍승서, 각 대학 동창회 대표, 여자흥학회 회장 유영준, 그리고 10여 명의 축사가 있었다.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조직 이후 방정환은 1921년 11월 10일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혐의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15)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외에도 동경에는 1922년 1월 천도교 동경전교실을 설치하였다. 동경전교실의 주요 구성원은 방정환을 비롯하여 민석현, 박달성, 이기정, 김상근, 이태운, 구중회, 고경인, 박영환, 강영호, 김의진, 배기원, 정일섭, 정중섭 등이었고, 박사직이 동경전교사로 임명되어 1922년 7월 부임하였다. 이렇게 조직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는 1921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3개반의 강연대를 조직하여 천도교 진리의 선전과 현대사상의 고취를 목적으로 조선 각지를 순회하는 강연회를 조직하였으며, 방정환은 이와 같이 천도교 청년단체의 변천과 활동 과정에서 각 지역에서 이루어진 강연회의 강사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2) 3․1운동 한편 경성청년구락부 조직 이후 방정환은 천도교주 손병희의 사위로서 교내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방정환은 손병희가 기독교세력과 3․1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의 민족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젊은 지식인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었다. 경성청년구락부는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송년회 자리에서 이들은 청년구락부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일으키자는 논의를 하였다. 방정환 역시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였는데 1918년 송년회에서 그가 연출한 연극 ‘○○령’의 ‘○○령’은 ‘민족동원령’을 의미하였다. 즉 전 민족을 동원하여 일제의 지배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이 연극의 대본은 방정환이 쓴 것으로 청년기에 접어드는 민족에 대한 방정환의 생각을 잘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나 아쉽게도 현재 이 연극의 대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뒤인 1919년 1월 유광렬이 방정환을 방문하였을 때 방정환은 유광렬에게 경성청년구락부의 민족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언급에서 우리는 방정환이 장인인 손병희를 통해 3․1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3․1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청년들의 역할로 ‘어른들의 심부름이나 힘써 하자’는 것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방정환은 3․1운동에서 청년들의 역할은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에 두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정환의 주장에 대해 경성청년구락부의 회장과 부회장이었던 이복원과 이중각의 반응은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 경성청년구락부가 3․1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으므로 방정환의 주장이 수용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방정환은 어떠한 방법으로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뒷받침하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역시 유광렬과 이태운의 회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광렬과 이태운의 회고에 따르면 방정환은 유광렬과 함께 재동의 방정환의 처가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출판하여 시민에게 돌렸다고 한다. 『독립신문』은 1919년 3월 1일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인쇄소 보성사의 사장이던 이종일이 발의하여 윤익선의 명의로 발간된 지하신문이다. 『독립신문』은 1만장 혹은 1만 5천장이 발행되었는데, 시가행진하는 군중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새벽에 15~16세의 남녀학생들이 다른 신발은 소리가 난다 하여 짚신을 신고 밤을 새워 배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경찰이 방정환의 집을 포위하고 수색하려 하자 방정환이 민첩하게 등사판과 원지를 자기 집 마당의 우물에 넣어 증거를 없애 무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경찰은 방정환을 체포하여 일주일 동안 구금하면서 온갖 고문을 가하였으나 방정환은 자백을 하지 않았고, 석방된 이후 방정환은 비밀장소에서 계속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고 한다. (3) 소년운동 방정환은 1920년 「어린이 노래」(『개벽』3, 1920)를 번역하여 소개하면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즉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용어를 ‘늙은이’, ‘젊은이’라는 용어와 대등한 의미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는 어린이를 비하하거나 낮추어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여 부르자는 의미라 생각된다. 이렇게 어린이라는 용어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강조했던 그이지만 소년이라는 용어도 계속 사용하였다. 그는 어린이를 대략 10세 정도로, 10세 이상의 연령이 높은 어린이는 소년이라 구분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회적으로 보통 인식되는 어린이와 소년의 연령은 그로부터 비롯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방정환의 소년운동은 잡지 『어린이』의 창간 및 그와 관련된 활동,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 활동, 그리고 색동회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동화, 동요 등의 창작과 번역, 번안 등의 활동도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방정환의 소년운동은 『개벽』을 통해 그 필요성이 주장되고 논의되었다. 천도교 소년운동의 이론을 이끈 김기전은 「장유유서의 말폐」에서 전통사회의 유교적 제도와 체제가 소년의 인격을 말살했으며, 조선이 해방된 근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소년을 해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이돈화는 소년교육에 대해 언어 교육, 유희를 통한 교육, 의복과 침식 교육 등의 가정교육을 강조함과 동시에 유치원과 소년단 등을 통한 교육을 촉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의 개조 본위는 온전히 아동문제에 있다”고 하였다.17) 그리고 이돈화는 어린이에게 경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18) 김기전, 이돈화 등 천도교의 이론가들은 소년, 즉 어린이에 대해 ‘인간’으로서 대우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이론적 흐름을 실천하여 어린이운동의 선구가 된 인물이 방정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적 틀 속에서 천도교청년회 포덕부 산하에 1921년 4월 지육체의 발육 방법과 실행을 강구하기 위해 소년부를 설치하였고, 5월 1일 어린이의 인격 옹호, 어린이의 정서 함양, 건전한 사회성의 함양을 목적으로 이를 천도교소년회19)로 개칭했던 것이다. 일본 유학 중이던 방정환은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지도하여 방학이 끝나고 일본으로 떠날 때 400~500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방정환은 1921년 무렵까지 강연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방정환이 강연보다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화구연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강연이라 하더라도 1922년 이후의 주제는 주로 어린이와 관련된 것이 많았다. 특히 1925년 3월 20일부터 30일까지 『어린이』 창간 2주년 기념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구, 마산, 부산, 김천, 인천 등지에서 ‘소년소녀대회’를 열었을 때 그 선전포스터에 ‘방정환씨 출장 참석합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광고 효과를 얻었다. 또 그가 천도교당에서 동화회를 열 때 입장권을 1,000매 발행했으나 늘 2,000여 명씩 와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그의 동화회는 각지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와 같이 소년운동이 활발해지자 방정환이 이를 보다 확산시키기 위해 소년운동의 지도적인 잡지라 할 수 있는 『어린이』를 1923년 3월 20일 창간하였다. 창간 이후 『어린이』는 독자가 급증하여 1925년 신년호의 경우 발간 7일만에 매진되어 3판까지 발행할 정도였다.20) 이와 같이 3판까지 인쇄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개벽』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방정환이 『어린이』 창간부터 편집을 담당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방정환이 일본 유학 중인 관계로 김옥빈(金玉斌)을 편집 및 발행인으로 두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방정환이 담당하였다고 한다.21) 방정환은 1925년 8월에 발간된 『어린이』31호부터 1931년 2월에 발간된 82호까지 『어린이』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하였다. 방정환이 병으로 눕고 사망하기 전까지 『어린이』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방정환은 『어린이』의 창간부터 자신의 사망 때까지 『어린이』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방정환은 1923년 3월 16일 동경 센다가야 온덴(千駄谷穩田) 101번지 방정환이 하숙하던 집에서 방정환, 강영호, 손진태(와세다대학), 고한승(니혼대학), 정순철, 조준기(이상 도요대학), 진장섭(도쿄고등사범학교), 정병기 등과 함께 어린이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다. 색동회 조직 과정에서 진장섭과 방정환의 제안에 따라 어린이날 제정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소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과정에서 조선소년단, 조선소년군, 불교소년회 등도 조직되었다. 방정환은 1923년 4월 17일 이들 단체 등 40여개의 소년운동단체와 함께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어린이날을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소년운동계에 사회주의가 확대되고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함에 따라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계열에서는 조선소년협회, 사회주의계열에서는 오월회라는 소년운동의 연합기관을 조직하여 소년운동은 분열되었다가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방정환을 위원장으로 한 조선소년연합회가 10월 16일 조직되었다. 맺음말이상에서 방정환의 민족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삶을 정리하면, 첫째, 그는 상인집안의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9살 무렵 가세가 몰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는 한편 보성소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매동보통학교를 거쳐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하였고, 손병희의 사위가 된 이후에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둘째, 그는 시천교 계통의 소년입지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18년에는 경성구락부를 조직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 천도교청년회, 천도교청년당, 천도교청우당 등 천도교의 청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유학과 잡지 『개벽』의 기자로서도 활동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종 강연회의 연사로서 참여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강연주제는 크게 천도교와 관련된 주제, 소년 혹은 어린이와 관련된 주제, ‘잘 살기 위하여’와 같이 삶의 방향성에 대한 주제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그가 천도교라는 종교 속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경성청년구락부 활동 과정에서 이른바 ‘민족대표’ 등의 어른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이 청년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3·1운동 때 ‘민족대표’를 뒷받침하여 『독립신문』을 출판하여 시민에게 돌리는 활동을 전개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넷째, 그는 소춘 김기전과 함께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였고, 1923년에는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 소년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어린이날은 그가 일본에서 색동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추진한 일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여타의 민족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계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소년운동에서도 민족주의계열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년운동단체는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계열에서는 조선소년협회, 사회주의계열에서는 오월회라는 소년운동의 연합기관으로 분화하였다. 1931년 7월 10여년에 걸쳐 소년운동 뿐만 아니라 청년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였던 그는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만 31세의 짧은 삶을 마감 하였고, 대한민국정부는 1990년 방정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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