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김모씨(38)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 20만원짜리 티셔츠를 샀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약 10여차례 입은 반팔 티셔츠의 목깃을 비롯해 여러 곳이 변색됐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결혼기념일 선물로 받은 제품이라 아껴가며 입었던 옷이다. | 신세계 강남점 |
이 제품은 신세계백화점 자회사인 신세계인터내셔날(031430)이 수입해 판매하는 ‘제이린드버그(J.LINDBERG)’ 반팔 티셔츠다. 김씨는 보유하고 있던 할인쿠폰을 이용해 이 제품을 10만원에 구매했다. 백화점을 찾아 변색 이유를 따져 물었다. 그러자 백화점 소비자실은 사설 심의업체에 의뢰해 제품의 변색 이유를 확인한 후 보상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지난 7월 사단법인 소비자공익네트워크 부설 한국소비생활연구원에 심의를 의뢰했다. 소비자공익네트워크는 민간 소비자 단체로 소비자 공익을 목표로 후원금 등을 모금하는 단체다. 이 회사 부설 연구소인 한국소비생활연구원은 수년간 롯데·신세계 등을 비롯한 주요 백화점의 사설 심의를 담당해 왔다.
한국소비생활연구원은 분쟁조정의견서를 통해 "착용과정에서 땀성분, 오염물질 등이 부착된 것이 고착화돼 빛과 산화작용에 의해 탈변색된 것"이라며 "취급부주의에 따른 소비자 과실이 명백하다"고 심의했다.
하지만 심의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전문 심의위원이 몇 명인지, 어떤 실험 연구를 통해 심의했는지 등을 담은 구체적인 심의 회의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식 홈페이지에도 나와있지 않다. 심의를 의뢰한 소비자에게도 ‘소비자 과실’이라고 적힌 판정서 한 장만 줄 뿐이다. 그러면서 "심의위원과 직접통화는 불가능하다"며 "심의내용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해당 판매처로 문의하라"고 했다.
| 의류 변색이 취급부주의에 따른 소비자 과실이라고 심의한 백화점 사설 심의업체 결과서.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이 의견서를 토대로 의류 변색은 ‘소비자 과실’이라며 교환·환불을 거부했다. 김씨는 땀이 스민 옷을 햇빛에 노출시켜 변색됐다는 사설 심의업체 결정이 의아해 이달초 한국소비자원을 찾아 다시 심의를 의뢰했다. 해당 의류를 항상 햇빛 노출이 없는 드레스룸에 보관했고 만약 착용과정에서 햇빛 노출이 원인이라면 구입한지 얼마되지 않은 의류의 원단이 빛에 취약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비자원 섬유제품심의위원회가 내놓은 심의결과는 뜻밖이었다. 신세계측 심의결과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소비자원은 "해당 옷은 원단 염색성이 미흡해 탈색, 퇴색 현상이 발생했다"며 "변색의 책임소재가 신세계인터내셔날에 있다"고 밝혔다.
염색물 빛깔의 여러 외적 조건에 대한 저항성 및 내구성의 정도를 뜻하는 세탁 견뢰도와 땀에 대한 저항성을 의미하는 땀 견뢰도가 미흡했다는 것이다. 소비자원은 "업체에서 의류 잔존가에 대한 배상을 해야한다"고 밝혔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김씨가 한국소비자원 제품심의결과서를 내밀자 그때서야 "10만원만 환불하겠다"고 했다. 김씨는 "50% 할인쿠폰을 이용해 샀는데, 쿠폰은 돌려받지도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 의류 변색이 제조판매업체의 ‘의류 불량’ 때문이라고 심의한 한국소비자원 결과서.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또 다른 소비자 박모씨(25)도 백화점에서 점퍼를 구입해 착용후 보관하는 과정에서 오른쪽 팔부분 원단이 변색된 것을 확인했지만, 판매업자는 제품에 이상이 없다며 보상을 거절했다. 그러나 소비자원 심의결과 원단 염색성을 뜻하는 일광 견뢰도가 미흡해 발생한 탈·퇴색 현상으로 ‘품질하자’로 판단됐다.
주부 서모씨(31)도 가방 불량으로 백화점을 찾았다. 이 곳에서도 사설 심의업체에 의뢰해 물건 결함인지, 소비자 과실인지 판정을 받는다고 했다. 사설 심의업체는 ‘소비자 부주의’라고 판단 내렸지만, 소비자원은 ‘제품 불량’이라고 밝혔다.
실제 의류·가방 사고 관련 소비자 분쟁 중 상당수가 제조판매업자 과실 때문이다. 그러나 업체 대다수가 제품의 하자를 인정하지 않고 사설 심의업체에 의뢰한 후 이를 토대로 보상을 거절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이 2017~2018년 3월까지 섬유제품심의위원회에 접수된 6200여건의 소비자분쟁결과를 분석한 결과 절반 이상은 사업자 책임이었다. 제조판매업자와 세탁업자 등의 책임이 57.3%였고, 취급부주의 등 소비자 책임은 18%에 불과했다. 품질하자 유형 중 제조불량이 42%, 내구성 불량이 29%, 김씨와 같은 염색성 불량이 23%로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김씨는 "소비자원 구제절차가 상당히 번거로워 바쁜 소비자들은 심의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백화점과 제조업체가 악용하고 있다"며 "사설 심의업체가 백화점 또는 제조사에 심의 의뢰비를 받는 구조다 보니 하청업체로 전락한 셈"이라고 말했다.
소비자원 관계자는 "제품하자로 소비자 피해가 발생하면 무상수리, 제품교환, 환불 순으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며 "소비자 스스로가 소비자분쟁해결기준 등에 따라 제조판매업체 측에 보상을 요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업체는 한국소비자원에 바로 의류분쟁 심의를 의뢰할 수 없어 사설 심의업체를 활용할 수 밖에 없다"며 "소비자원처럼 공신력 있는 사설 업체를 찾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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