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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happykingdoom1004 | 2020.05.08 | 조회 959 | 추천 2 댓글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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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영화 같은 인생을 살다 간 IT 트렌드의 주인공 [ Steve Jobs ]
“곧 죽게 된다는 생각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큰 도움이 된다. 사람들의 기대, 자존심,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거의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이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무언가 잃을 게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 당신은 잃을 게 없으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다.” –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2005년) 입양으로 시작 된 인생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24 ~ 2011 .10.5)는 195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인 미국인 집안이었던 생모 조앤 심슨의 가족은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가 시리아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고, 결국 조앤 심슨은 미혼모의 신분으로 잡스를 낳은 후 입양을 선택했다. 심슨은 잡스의 새 부모로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 부부를 원했다. 그리고 실제로 변호사 부부가 잡스를 입양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잡스 대신 여자아이를 택했고, 잡스는 대기자 명단에 있던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돌아갔다. 심슨은 폴 잡스가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고 클라라 잡스도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입양 서류에 서명하길 거부했고, 잡스 부부에게 “스티브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입양을 허락했다. 당시 북캘리포니아는 급격한 변화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한편으로는 기술이 급격히 발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에서 넘어온 사이키델릭 음악과 신비주의가 크게 유행했다. 이 두 가지 문화는 잡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잡스는 비틀즈의 팬이자 자유주의의 신봉자였다. 이는 잡스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검정 터틀넥과 청바지 복장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워즈니악과의 만남, 애플 창업, 그리고 좌절고등학교 졸업 후 잡스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칼리지(Reed College)에 의학 및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입학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가치가 없어 보이는 과목들을 필수 이수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해 비싼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점 등의 이유로 한 학기 후 자퇴를 결심한다. 친구의 집 바닥에서 잠을 자고 콜라병을 판 돈과 무료 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생활 속에서도 그는 청강을 통해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특히 이 때 그가 들었던 서예 수업은 나중에 매킨토시의 서체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잡스는 몇 년 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 1950.8.11~)과 홈브루컴퓨터클럽(Homebrew Computer Club)에 가입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것이다. 곧이어 워즈니악과 협력해 잡스 부모의 차고 안에서 애플을 설립하고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I’을 내놓았다. 이후 후속작인 ‘애플Ⅱ’가 뜻밖의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잡스와 애플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 몇 차례 부진을 겪었고 잡스가 30살이 되던 해 애플의 이사회는 그를 해고했다.
애플에 돌아와 세계 최고의 IT 기업가로몇 달간 공황상태에 빠졌던 잡스는 넥스트를 다시 설립하고 픽사를 인수하며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이후 픽사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으로 꼽히는 [토이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디즈니에 인수됐다. 조지 루카스로부터 1,000만 달러에 인수한 픽사를 디즈니에 74억 달러에 팔았으니 실로 대단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로렌 파월과 연인이 되었고 1991년 결혼하게 된다. 잡스와 파월 사이에는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사실 오래 전 잡스에게는 여자친구 사이에서 낳은 리사라는 딸이 또 있었다. 하지만 잡스는 리사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자신이 리사의 아버지임을 깨달은 잡스는 미안함의 의미로 새 컴퓨터에 딸 이름을 붙여 내놓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첫 마우스 기반 컴퓨터 ‘리사 컴퓨터’다. 1996년, 애플은 넥스트사를 인수했다. 그리고 잡스는 애플의 최고경영자로 복귀했다. 복귀 후 그는 1997년 10억 달러의 적자를 한 해만에 4억 달러의 흑자로 전환하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그가 내놓은 제품은 연달아 성공했고 애플은 세계 최고의 IT기업으로 우뚝 올라서게 된다. IT사에 남은 그의 화려한 업적은 아래와 같다. IT사에 길이 남을 그의 업적애플I 1976년 출시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중 하나인애플I은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의 합작품이자 애플이 선보인 첫 번째 제품이다. 200대 가량이 소량 생산되어 지방 소매점에서 팔린 탓에 큰 파급력은 없었지만, 오늘날의 애플이 있게 한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애플Ⅱ 애플I이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라면, 애플Ⅱ는 최초로 성공한 개인용 컴퓨터다. 1977년 출시된 애플Ⅱ는 컬러 그래픽 구현과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로 경쟁사 제품과 차별화를 꾀했다. 애플Ⅱ는 초창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휩쓸며 가장 인기있는 컴퓨터로 자리잡았다. 매킨토시 1984년 등장한 매킨토시는애플의 광고 공세에 힘입어 꽤 쏠쏠하게 팔렸다. 특히 그래픽 분야에서 높은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매킨토시의 후속작은 부족한 소프트웨어로 인해 판매 부진을 면치 못했다. 아이맥 스티브 잡스의 성공신화는 아이맥에서 출발했다. 1998년 출시된 아이맥은 매킨토시의 일체형 버전으로, 혁신적인 디자인과 화려한 색으로 인기를 끌었다. 아이맥은 1998년 한 해 동안 80만 대 가량 팔리는 기록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적자를 면치 못하던 애플은 흑자로 돌아서게 된다. 아이팟 애플은 휴대용 MP3플레이어 시장에서 후발주자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001년 잡스가 내놓은 아이팟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후 잡스는 아이팟 미니, 아이팟 나노 등 후속작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MP3플레이어 시장을 장악했다. 아이팟이 성공했기에 아이폰이 등장할 수 있었다. 아이폰 2007년 등장한 아이폰은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쉬운 인터페이스와 파격적인 디자인은 전세계 휴대폰 사용자들을 매료시켰고, 이후 출시된 대부분의 스마트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이튠즈와 앱스토어도 아이폰의 성공에 힘을 보탰다. 아이패드 2010년 등장한 태블릿 PC, 아이패드 역시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다. 애플은 1년만에 무려 1,900만 대의 아이패드를 팔아치웠고, 전 세계 곳곳에서 아이패드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다른 제조사들도 잇따라 태블릿 PC를 내놓았지만 아이패드에 비해서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혁신의 아이콘' 떠나다하지만 사업적인 성공과 더불어 병마가 찾아왔다. 잡스는 2004년 췌장암 진단을 받고 대수술을 했다. 2009년에는 간이식 수술도 받았다. 점차 건강이 악화되자 2011년 결국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10월 5일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스티브 잡스 주요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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