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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추방한 한국이 그립다던 ‘유쾌한 미누’씨를 다시 마주합니다
해봐0 | 2020.05.17 | 조회 660 | 추천 0 댓글 2
“나 이제 죽어도 좋아.”
미누(네팔 이름 미노드 목탄)가 말했다. 그가 마이크를 잡은 다국적 밴드 ‘스탑 크랙다운’이 2018년 1월 네팔에서 공연을 마친 직후였다. 공연은 물론 멤버들이 재회한 것도 9년 만이었다. 2009년 미누는 한국에서 강제추방 당했다. 1992년 1세대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들어와 뿌리내린 17년 세월이 송두리째 뽑혔다.
지혜원 감독이 미누에 관한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2016년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즈음해 도널드 트럼프의 반이민자 정책으로 추방될 위기에 몰린 한국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에 그는 미누를 떠올렸다. “멀리 갈 것도 없었어요. 이주민 문제는 우리 가까이에도 있었으니까요. 네팔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한국을 그리워한다는 미누의 경계인으로서의 삶이 궁금해졌어요.” 지난 14일 인천 부평의 미얀마음식점에서 만난 지 감독이 말했다. 이 식당은 스탑 크랙다운 멤버 소모뚜가 운영하는 곳이다.
2003년 정부가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대대적으로 단속하자 이들은 농성과 시위로 맞섰다. 그때 미누·소모뚜·소띠하 등이 농성장에서 결성한 밴드가 바로 ‘단속을 멈추라’는 뜻의 스탑 크랙다운이다. 2006년 한국인 송명훈이 드러머로 가세했다. 이들은 ‘손무덤’ ‘월급날’ 등의 노래로 이주노동자 문제를 알리고 인권보호에 앞장섰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기타 메고 시위 현장과 공연장을 누볐어요. 그러다 갑자기 미누 형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고 나서 벌어진 일이었어요.” 소모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2017년 봄, 지 감독은 네팔로 날아갔다. 미누는 영화 촬영에 흔쾌히 동의하며 딱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나를 불쌍하게 그리지 마세요.” 이는 지 감독이 앞서 한국에서 소모뚜를 만났을 때도 들었던 말이었다. “이전에도 스탑 크랙다운이 미디어에 많이 소개됐는데, 허위·조작·과장이 많았어요. 우리를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감독님께 당부한 건 그래서였어요.” 소모뚜가 말했다.
네팔에서 미누는 한국행을 준비하는 예비 이주노동자를 교육하고 공정무역 사회적 기업 트립티의 네팔 대표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 지 감독은 1년 반 동안 미누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가까이에서 본 미누는 정말 많이 웃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 웃음 속에 어떤 때는 슬픔이, 어떤 때는 회한이 담겨 있었죠.”
예상치 못한 상황이 줄줄이 닥쳤다. 트립티 네팔 대표로서 한국에서 열리는 서울국제핸드메이드페어에 갑자기 초청된 것이다. 네팔 한국대사관에서 비자까지 나왔다. 들뜬 마음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내렸지만, 그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의해 입국을 거부당했다. 법에는 강제출국 이후 5년간 입국이 금지된다고 명시돼 있지만 출입국관리사무소 쪽은 10년이 넘어야 입국할 수 있다고 했다. 미누는 큰 상처를 안고 네팔로 돌아갔다. 소모뚜·소띠하·송명훈이 네팔로 날아가 9년 만의 스탑 크랙다운 공연을 펼친 건 낙담한 미누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연습을 제대로 못 했는데도 무대에서 미누 형과 손발이 척척 맞을 땐 정말 짜릿했어요.” 소띠하가 당시를 떠올렸다.
2018년 가을,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 감독이 완성한 영화
가 디엠제트(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면서 입국이 허용됐다. 단, 사흘간 영화제 지역에만 머무르는 조건이었다. 미누는 한국에서의 첫 끼인 비빔냉면을 앞에 두고 실향민이 고향 음식을 만난 것처럼 눈물을 흘렸다. 이튿날 저녁에는 스탑 크랙다운 멤버 등 지인들과 짜장면을 먹었다. 뒤풀이로 노래방에 가서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그는 네팔 공연 때 했던 말을 또다시 했다. “나 이제 죽어도 좋아.”
그 말이 현실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미누는 네팔로 돌아간 지 한달 만인 10월14일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다음에 한국 오면 공연도 하고 제주도에도 가자”는 멤버들과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됐다. “1년만 더 지나면 한국에 자유롭게 올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송명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일 이후 지 감독은 영화를 재편집했다. “영화를 다시 보니 네팔에서의 삶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더라고요. 미누가 떠난 이상 그가 한국에서 한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객관적으로 짚어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재탄생한 영화가 오는 27일 개봉한다. “이주민에 대한 법과 제도는 개선됐지만, 이주민을 차별·혐오하는 보이지 않는 벽은 더 공고해진 것 같아 안타까워요. 이 영화가 그 벽에 균열을 낼 수 있으면 합니다.” 하늘에 있는 미누도 한마음일 듯하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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