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본과 2학년 때였다. 인간미라고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본과 생활에 지칠 그 무렵, 나를 추스릴 수 있는 취미가 하나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즐기는 면만 도드라져 보여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재미가 있으면서 정신 수련도 되는 바둑을 택했다. 바둑을 두면서 마음을 닦아 어지러운 현실을 이겨볼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바둑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기원에 가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랬는데 가장 큰 이유는 내겐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때엔 항상 먼저 책을 통해서 그 세계를 간접 경험하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점엘 가서 나와 있는 바둑책을 무작위로 샀다. 책이 오십 권을 헤아리게 될 무렵 바둑이 어렴풋하게 머리 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기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실제와 이론은 언제나 거리가 있는 법이니까 현실 감각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책을 보고 공부한 것이 전혀 소용없어 보였다. 그러나 자꾸 두다 보니까 책을 읽어 두었던 것이 큰 거름이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컴퓨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기계를 사기 전에 책을 먼저 사서 보았다. 보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빨간 줄을 그어놓고 그것에 대해 잘 나와 있다는 책을 수소문해서 사 보았다. 또 다른 책을 보다 보면 그 모르던 부분이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경우도 있었다. 같은 책도 몇 번씩 보고, 모르는 것이 많아도 소처럼 부지런히 읽어나갔더니 결국은 그 책을 통째로 이해할 수 있었다. 워드프로세서를 처음 사용할 때 사람들은 흔히 컴퓨터 기계와 워드프로세서용 소프트웨어를 먼저 산다. 그리고 급한 대로 바로 워드프로세서를 쓰는 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워드프로세서를 쓰려면 우선 도스를 알아야 하고 그 전에 기계 속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통해 우선 컴퓨터 기계에 관한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도스에 관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공부를 했다. 그 다음에 기계를 사고 책에서 배운 내용을 연습해 보았다. 그리고 맨나중에 워드프로세서 쓰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하면 처음에는 행보가 무척 느려 보인다. 그러나 기초가 튼튼하니 나중에는 오히려 앞설 수가 있는 것이다. 의과대학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이 시험볼 대 처음부터 족보라고 불리는 문제집을 보고 공부하는 데 반해 나는 처음에는 교과서를 봤다. 교과서의 니용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니 문제집으로 공부한 사람보다 성적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 문제집에 있는 문제들도 결국은 책에 다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빠졌지만 아무튼 나는 취미도 본업도 모두 그렇게 공부했다. 그런식으로 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한단계 올라서는 데에 남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컴퓨터도 바둑도 다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책을 봐둔 덕분인지 얼마 안 가서 가속도가 붙고 남들보다 훨씬 빨리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일을 성취하려고 할 대 으레 쉽고 빠른 지름길을 찾고 택하나. 혹은 맨몸으로 실전에서 부딪치며 배워나간다고도 한다. 하지만 내 경우는 언제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튼튼한 기초 쌓기에 힘을 기울인다. 우직하게 기본을 다지는 것, 그것이 내겐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