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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토크
~싸게 싸게
어기적 | 2011.02.10 | 조회 10,674 | 추천 79 댓글 0
'싸게싸게'와 '싸목싸목'

가족과 함께 미국의 '모뉴멘트 밸리(Monument Valley)'라는 곳을 구경한 적이 있다. 유타와 아리조나 주의 경계에 있는 이곳은 사막 지대로서, 오랜 세월 동안 바람에 깎인 바위산들이 온갖 모양을 한 채 서 있는 곳이다. 장갑처럼 생긴 '장갑 바위'나 세 개의 바위산이 정답게 서 있는 '세 자매 바위' 등, 수많은 바위산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데다 그 높이마저도 수백 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으니. 비록 사막이라 해도 가히 볼만한 곳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모뉴멘트 밸리는 원래 인디안들이 살던 곳이라서 지금도 일부 지역은 인디안들의 거주 지역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곳을 구경하려면 거주지 아닌 곳을 골라 차를 타고 돌아다녀야 하는데, 다만 인디안들이 운전하는 지프를 탈 경우, 거주지 내부까지 구경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진다. 그러다 보니, 입구 주위에는 인디안들이 늘어서서 관광객들을 호객하기도 한다.



우리 가족도 입구에 들어서니, 인디안들이 '곤 니찌 와'라고 일본말로 인사를 한다. 일본 사람이 아니라고 고개를 젓자, 이번에는 '니 하오 마?'라는 중국말로 인사를 하는데, 급기야 한국 사람이라는 신분을 밝히자, 이번에는 유창한 한국말로 아는 체를 하는 것이 아닌가? "빨리 갑시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일본이나 중국은 제대로 된 인사말을 하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 대신 '빨리 갑시다'란 말을 쓰다니, 어떤 고약한 이가 이들에게 한국의 인사말이라고 이 말을 가르쳤단 말인가? 그럴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이곳을 다녀갔던 수많은 한국 사람들한테서 배운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성미 급한 것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 사실이 미국 인디안들에게까지 알려져 있을 줄은 차마 몰랐던 것이다. 



'빨리'는 그래서 오늘날 한국 사람의 성미 급한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언어적 표현이라 하겠는데, 우리말에는 '빠르다' 말고도 같은 뜻으로 쓰이는 '싸다'나 '재다'와 같은 말이 더 있다. '싸다'와 '재다'는 '빠르다'에 비해 홀로 쓰이는 빈도는 낮지만, 두 말이 합해진 '재빠르다'나 '잽싸다' 등으로는 흔히 쓰인다.



'잽싸다'는 물론 '재다'와 '싸다'가 합해진 말일텐데, '재싸다'가 아닌 '잽싸다'인 것으로 미루어 '싸다'의 옛말은 '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다'의 첫 자음 /ㅂ/이 앞 음절에 붙어서 '재다'가 '잽다'로 된 뒤, 된소리로 변해 오늘날의 '잽싸다'가 생겼을 것이다. '싸다'의 옛말로서 17세기 문헌인 『諺解胎産集要』에 '  다'가 확인되지만('겨집의 죡 쇼음이 심히  식   이라'), '잽싸다'와 같은 말을 보면 그 이전에는 '다'가 아닌 '다'이었음이 분명하다.



 '싸다'는 또한 표준말에서 '입이 싸다'처럼 쓰이는 수가 있지만, <속도가 빠르다>는 뜻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전라도 말에는 이 뜻으로 흔히 '싸게'라는 부사적 표현이 쓰여, '싸게싸게 오제 멋허고 자빠졌냐?'처럼 재촉하는 말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밖에도 <불길이 세다>는 뜻으로 '약헌 불에다 말고 싼 불에다가 지져라'처럼 쓰일 수 있다.



전라도 말에는 '싸게싸게'와 반대의 뜻을 갖는 '싸목싸목'이라는 부사가 있다. 이 말은 '싸게싸게'와 달리 언제나 '싸목싸목'처럼 반복적인 형태로 쓰일 뿐, '싸목' 홀로는 쓰이지 못하는데, '영칭께 싸목싸목 묵어라'(=얹히니까 천천히 먹어라)처럼 쓰인다. '싸목싸목'의 어원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똑같은 '싸'가 들어 있다 하더라도 그 뜻이 정반대로 나타났으니, '싸목싸목'의 '싸'와 '싸게싸게'의 '싸'가 같을 리는 만무한데, '싸목싸목'이 어떤 낱말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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