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설계사인 글쓴이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과 알콩달콩 친구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아빠 없이도 밝게 자라준 아들이 너무나 고맙고 대견하답니다.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식탁 위엔 아들 민영이가 또박또박 쓴 생일 카드와 미역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생일엔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고심해서 고른 생일 선물이 바로 미역인가 보다.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왔다. 올해 열 살인 아들은 내 유일한 희망이고, 내 삶의 전부다. 그런데 10년 전, 나는 무섭고 어리석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너무 부끄럽고 고통스럽다. 내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에게, 그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아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뻔했다. 나는 상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다. 남편이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데다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이었기에 집에서 무척이나 반대한 결혼이었다. 그래도 그땐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남편이 너무나 허망하게 저 세상으로 가기 전까진…. 그때 나는 출산을 한 달 앞두고 있었지만, 아이의 탄생을 축복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했다. 그 전엔 가난을 행복한 생활의 양념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가난이란 게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때의 나는 아이를 위해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런 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냉혹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제 몸 하나도 책임질 수 없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어느 날,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홀린 듯 근처 고아원에 가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들을 버려두고 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래, 고아원에 있으면 배는 곯지 않을 거야.’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려면 이렇게 젊은 내가 어린 자식 하나 못 거둘까.’ 나는 사람들이 흘금거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다시 고아원에 가 아이를 데려왔다. 그제서야 겨우 아이의 맑은 눈과 천사 같은 미소가 내 눈에 들어왔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어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그날의 철없던 행동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속에 묵직한 무언가가 걸려 있는 듯하고, 아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